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사(士)는 서주시대 대부와 서민 사이에 해당하는 계급이었다. 대부는 사, 사는 조(皂)를 신하로 삼았다. 사족은 공인, 상인 농민과 함께 ‘사민(四民)’이라고 불렀다. 사민은 한 곳에서 살 수 없었다. 사족은 문사와 무사로 구분했다. 무사는 영주의 경호를 담당했으며, 문사는 예악과 의식을 담당했다. 이들은 영주의 녹봉으로 생활했다. 춘추전국시대 교체기에 문사는 제후들의 쟁패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가장 뛰어난 사회적 동력으로 발전했다. 경대부에 비해 그들은 특정 영주에 대한 충성심에서 자유로웠다. 이들의 동향은 정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족이 빈천한 신분에서 갑자기 장상(將相)으로 비약한 사례는 이미 드물지 않았다. 포의 출신 경상(卿相)은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했다. 공자가 한탄한 예악이 붕궤된 사회에서 이들은 새로운 사회질서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각자의 이상과 실천방식, 수단이 있었으므로 동일한 이념적 결속이나 결집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사족이 사회적 표상으로 등장한 과정에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하나는 특별한 주군을 섬기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자유롭게 이동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아침에는 진을 찾아갔다가 저녁이면 초에 나타날 정도로 열국을 주유하면서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 다른 하나는 계급적으로 귀족과 서민의 사이에 처했기 때문에 양쪽의 조화와 충돌을 완충하거나 격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계급질서에 대한 이러한 충격은 당시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구조가 격변했음을 반영한다. 사족의 등장은 사회의 변혁을 가늠하는 체온계 역할을 했으며, 다른 측면에서는 사회적 변화의 추동력이 되기도 했다. 상인들의 유동성이 사회의 물질생산구조와 규모 그리고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면, 사족의 유동성은 정국과 사회사상, 그리고 사회적 심리의 변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춘추전국 교체기에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사족은 3가지 기원이 있었다. 첫째, 몰락한 귀족의 자제로 정규교육을 받았으나, 정치적,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부는 당시의 정치적 풍운을 기회로 제후들에게 유세하면서 출세를 모색했다. 공자가 대표적이다. 그는 강학을 열고 각국에 유세하는 것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공자는 전국시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유세객의 시초였다. 둘째는 원래 주왕실에서 예악을 담당하던 관리가 민간으로 들어온 경우이다. 이 부류에 속하는 문사들은 전문적인 기능과 지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제후들이 정권을 세울 때 매우 유용했다. 그들은 상당한 정치적 식견과 책략을 지니기도 했으며, 실질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사회의 사상적 조류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노자는 주왕실의 도서관을 담당했던 사람으로 이런 부류의 대표적 인물이다. 셋째는 농, 공, 상업에 종사하던 서민들이 신분상승으로 사족이 된 경우이다. 승묵(繩墨)의 장인으로 천민에 해당했던 묵자가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 인물이다. 묵자는 노의 향사(向史) 각(角)에게 예를 배워 초(楚), 제(齊), 위(衛) 등의 나라에 유세를 했으며 송(宋)에서는 관직을 역임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서민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제후에게 출사하여 영달을 누렸던 사람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춘추전국시대 교체기에 개인이 사학을 열어 제자들을 기르는 풍조가 크게 성행했는데, 이러한 시대적 풍조를 이용하여 서민이나 범죄자들까지도 사계급으로 상승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학은 서민들에게 신분상승의 기회를 주었다. 사계급과 서민들은 사학을 사다리로 이용하여 계급적 한계를 타파할 수 있었다. 관학은 사학의 발달과 함께 급속하게 쇠퇴했다. 하층 계급인 서민들은 사학을 통해 학문을 익혀 관직으로 대거 진출했고, 전국시대의 정치무대는 이들이 주인공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학의 부활을 생각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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