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명희종 주유교(朱由校)는 혼용하고 무능했다. 조정 대권은 환관의 우두머리인 위충현(魏忠賢)과 유모 객(客)씨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위충현은 엄당(閹黨)을 형성했다. 반대파는 모두 박해를 받았다. 양련(楊漣)과 주기원(周起元) 등이 차례로 투옥돼 무자비한 고문을 받다가 옥사했다. 성격이 강한 장유비(張裕妃)는 위충현에게 반항하다가 별궁에 유폐돼 굶어죽었다. 희종은 위충현을 충신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위충현을 ‘9천세’라고 불렀다. 위씨 일가는 어린아이까지 공, 후, 백작으로 봉해졌다. 관리들은 다투어 위충현의 생사당(生祠堂)을 지었다. 위충현이 황제까지 노린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천계7년(1627) 8월, 희종에 사망했다. 위충현이 희종의 동생 주유검(朱由檢)을 옹립했다. 그가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이다. 두려웠던 숭정은 궁에서 주는 음식을 먹지도 못했다. 엄당을 제거하고 싶었지만, 당장은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고도의 인내력을 발휘했다. 위충현도 신임 황제를 시험해보려고 동창제독에서 사임하겠다고 요청했다. 황제는 위충현의 조카 위량경(魏良卿)과 위붕익(魏鵬翼)에게 철권을 하사하며 안심시켰다. 숭정제는 위충현의 날개부터 부러뜨렸다. 위충현과 짝인 객씨가 궁을 나가겠다고 하자 허락했다. 위충현의 앞잡이 태감 이영정(李永貞) 등의 퇴직도 허락했다. 엄당은 전전긍긍했다.

10월, 외조에서 위충현의 조력자였던 병부상서 최정수(崔呈秀)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귀향했다. 어사 양유원(楊維垣)과 가계춘(賈繼春)이 최정수를 탄핵하며 황제의 속내를 떠보았다. 최정수가 파직을 요청했다. 서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숭정제는 자기의 속셈을 감추기 위해 만류했다. 최정수는 3차례나 사직상소를 올렸다. 숭정제는 온화한 내용의 성지를 내려 허락하고 편안히 귀향할 수 있도록 편의까지 제공했다. 숭정제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으나 속내를 조금씩 드러냈다. 얼마 후 엄당을 시험하기 위해 위충현의 생사당을 세우자고 주장한 절강순무 반여정(潘汝禎)을 삭탈관직하고 서민으로 삼았다. 조정에 깔려있던 엄당은 감히 반여정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엄당의 세력이 약화되었다고 판단한 숭정제는 확신을 가지고 그들을 철저히 제거할 기회를 노렸다. 당시 조정에는 위충현의 위세가 두려워 누구도 감히 위충현을 탄핵하려고 하지 않았다. 관직이 낮은 공부주사 육징원(陸澄源)과 병부주사 전원각(錢元慤)이 먼저 포문을 열어 위충현의 죄악을 성토했다. 숭정제는 구체적인 대안이 없다고 판단해 참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어서 가흥의 공생 전가징(錢嘉徵)이 위충현의 10대죄악을 열거하며 탄핵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황제와 나란히 권력을 누렸다. 둘째, 황후를 멸시했다. 셋째, 병권을 농단했다. 넷째, 2조(祖)를 종(宗)의 반열에 올리지 않았다. 다섯째, 번봉(藩封)을 마음대로 삭감했다. 여섯째, 성인을 무시했다. 일곱째, 관작을 남용했다. 여덟째, 변경의 공을 감추었다. 아홉째, 백성의 재물을 축냈다. 열째, 관문을 마음대로 조절했다. 주소가 올라오자 숭정제는 위충현을 불러 그의 앞에서 내시에게 읽게 했다. 두려웠던 위충현은 자신의 도박친구였던 신왕부의 태감 서응원(徐應元)에게 많은 재물을 주고 도움을 요청했다. 숭정제는 서응원을 내쫓았다.

11월, 위충현에게 봉양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린 후 곧바로 체포령을 내렸다. 부성에서 체포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은 위충현은 이조흠(李朝欽)과 함께 자살했다. 객씨는 태형을 맞다가 죽었다. 고향에 있다가 위충현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최정수는 종말이 왔다고 느껴 술을 마시고 자살했다. 나중에 숭정제는 260여명의 엄당을 죽이거나 종신금고형에 처했다. 여기까지 숭정제는 상당한 정치적 감각을 지녔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가는 나라를 다시 세울 수는 없었다. 황제 한 사람의 능력이 나라를 구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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