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소주(蘇州)의 소(蘇)를 파자하면 ‘艹’+‘魚’+‘禾’가 된다. 따뜻한 기온, 풍부한 수량, 비옥한 토지 덕분에 초목이 무성하고 물고기가 많이 잡히며 벼농사가 잘된다. 살기에 가장 좋다는 자랑이기도 하지만, 잠자리는 불편했을 것이다. 주택이 대부분 2층 또는 3층인 것은 습도가 높아서 1층에서 잠을 잘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소주(蘇州)가 유명해진 것은 풍부한 물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인이 만든 경이로운 토목사업인 운하 때문일 것이다. 이 운하는 우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수양제는 이 지역의 경제력을 활용하기 위해 소주를 기점으로 북경에 이르기까지 운하를 건설한다. 자연천을 이어 연결한 이 장대한 운하는 남방의 경제를 활성화했지만, 그것을 이용한 화려한 궁정생활과 보다 안정적인 국방을 다지려고 고구려를 원정하면서 그의 몰락을 재촉했다.

경제력은 단기적으로는 국가를 부강하게 하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나라를 망친다. 양제를 진시황에 버금가는 폭군으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레이황의 견해는 다르다. 그는 경제와 사회의 통제시스템의 유무에 주목한다. 한제국이 멸망한 이후 중국은 삼국시대와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쳐 오호십육국시대라는 370년간의 장기적인 분열의 시대를 거친다. 혼란기이기도 하지만 거대한 국가건설을 위한 조정기이기도 하다. 북방민족이 북중국에서 중국인과 동화됐고, 중화인은 남방으로 이동해, 중국의 공간적 개념이 본격적으로 확대됐다. 통합의 기틀은 중화인이 아니라 북방 선비족의 척발씨(拓跋氏)가 세운 북위였다. 활력을 잃은 중국인을 대신해 북방민족이 동아시아를 지배했다. 급성장한 고구려가 만주와 북중국으로 확장하자, 수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북중국을 통일한 선비족이 양자강 이남을 차지한 남조 송과 싸운 곳이 소주이다. 그러나 광활한 대지를 흐르는 수많은 물줄기 때문에 쉽게 공략하지 못했다. 북방 이주민들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독립 세력을 유지했다. 척발씨가 기른 수군은 수왕조가 이어 받아 고구려 원정에 이용이 되었다. 그 여파가 고구려로 밀려왔다. 레이 황은 양제의 고구려 원정이 지나치게 집중된 부의 소모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부의 증대로 수의 통일에 이바지한 자작농이 무너지고 고질적인 토지겸병이 되살아난다. 어떻게든 소비지향적 정책을 펼치는 것만이 국가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대책이 된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 논리는 미국 경제가 전쟁으로 활력을 되찾는 것을 통해 납득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수양제도 폭군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창조적 상상력을 지닌 군주였다. 그 예가 운하건설과 장성개축이라는 토목사업이다. 군사적 재능도 뛰어나 20세에 남조 진(陳)을 멸망시키고 강남 일대를 평정했으며, 베트남과 티베트를 접수하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왜 고구려 원정은 실패했을까?

하나는 실패를 모르던 그가 한 번의 실패로 좌절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관리시스템의 부재이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은 치밀한 계산과 전략적 운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는 경제력만 믿고 방만하게 운용했다. 고구려 전쟁에 동원된 인원은 113만 3800명, 보급을 맡은 인원은 그 배를 넘었다고 하니 오늘날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군이 총동원된 것과 같다. 성을 공격할 때 하도 군사가 많아서 배치할 자리가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612년에 수의 육군은 압록강과 요하 사이에서 강이식(姜以式)에게 막혀 전진하지 못했고, 수군도 대동강 하구에서 건무(建武)에게 막혔다. 교착상황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전의를 상실한 수군을 대파했다. 소비정책이 맞았는지는 몰라도 애꿎은 전쟁에서 죽은 수많은 중국인의 혼령이 불쌍하다. 몰락을 거듭한 양제는 마침내 618년 심복들에게 살해되었다. 역사의 무대는 매우 넓다. 시선을 확장해야 사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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