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장군비애(將軍悲哀)
[고전 속 정치이야기] 장군비애(將軍悲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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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12월 14일, 벗들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한 421주기 제사를 위해 노량으로 간다. 문득 황해해전에서 전사한 중국의 해군제독 정세창이 생각났다. 1887년 중국은 영국과 독일로부터 치원, 정원, 경원, 내원 등 4척의 쾌속전함을 구매했다. 정세창이 인수해 돌아왔다. 그는 중국해군만으로 함대를 지휘하면서 훈련과 항해를 병행했다. 해전이 벌어졌을 때 모든 경우에 대비한 모든 경우를 훈련하며 중국해군의 전투력을 높였다. 1888년 9월, 북양해군이 정식으로 창설됐다. 이듬해 이홍장은 북양해군에 중군을 신설하고 정세창을 중영부장과 치원함 함장으로 임명했다. 정세창은 북양해군을 강군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는 탁월한 해군장군이었다. 비록 해외에서 유학을 한 적은 없지만 서학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훈련에 미쳐서 대포소리를 음악처럼 듣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라를 사랑하려면 국민을 사랑해야 하며, 군사를 백성들에 못지않게 사랑해야 한다. 정세창은 국민들을 아끼고 사병들을 사랑했다. 1887년 영국에서 구입한 전함을 이끌고 지브롤트해협을 지났다. 스페인인이 팔고 있던 광동출신 중국인을 구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도중에 사망한 병사는 중국풍습에 따라 매장했다. 낯선 땅에 묻힌 사병의 영혼도 감사했을 것이다. 정세창은 평소에 ‘충용(忠勇)’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일본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풍도(豊島)에 정박한 북양함대를 기습공격하자, 정세창은 보복공격을 감행하면서 승패를 알 수가 없으면 일본군함과 함께 바다로 침몰하겠다고 선언했다.

황해해전에서 그는 자신의 말처럼 정말 바다를 무덤으로 삼았다. 1894년 9월 17일 12시 50분, 기함 정원함이 일본의 함대를 향해 표격을 하면서 황해해전이 시작됐다. 전투는 점차 북양함대가 불리하게 진행됐다. 치원함의 장병들은 용감히 싸웠다. 격전은 오후 2시 30분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치원함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탄약도 떨어졌다. 정세창은 적의 주력전함인 요시노함을 향해 전속력으로 치원함을 몰아 부딪치려고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적이 발사한 어뢰가 치원함에 명중하면서 선체가 기울기 시작했다. 장병들은 다투어 바다로 뛰어들었다. 정세창은 바다로 떨어졌다. 그를 수행하던 유충체가 구명대를 던졌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거절하며 소리쳤다. “상황은 이미 끝났다. 나 혼자 어떻게 살겠느냐!”

그의 애견이 헤엄쳐서 다가와 팔을 물고 잡아 당겼다. 그가 밀어내자 애견은 다시 그의 머리카락을 물고 당겼다. 그는 손으로 애견을 잡아 물속으로 집어넣고 자신도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치원함에 탑승했던 250명의 장병들 가운데 27명만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장렬히 희생됐다. 당시 정세창의 나이는 45세였다. 정세창이 아쉽게도 희생되자 온 나라가 슬퍼했다. 광서제는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태자소보(太子少保)’로 추봉했다. 또 흠차대신을 광동으로 파견하여 정세창의 유족들을 위로하고, 친히 제문과 비문을 지었다. 이듬해 광서제는 백은 10만냥을 하사해 정씨종사를 세우도록 했다. 종사의 대문 양쪽에는 다음과 같은 함련이 있다고 한다. “운대에서 공이 으뜸이니, 갑오년에 이름을 남겼구나(雲臺功首, 甲午留名)!”

운대는 후한의 두 번째 황제 효문제가 건국에 공이 컸던 28명의 초상화를 그려 걸어 둔 곳이다. 위해 사람들은 그의 초상화를 걸어 두었다. 영성 사람들은 성산두(成山頭)의 일주사(日主祠)에 그의 목조상을 앉히고 해마다 제사를 올린다. 환취루 광장에는 정세창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무심한 사람들은 동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잘 모른다. 광화문을 지날 때 충무공 이순신의 동상을 보고도 무심히 지나치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나마 충무공의 동상을 박정희가 세웠다고 없애자는 주장이 나오지 않는 것만도 다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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