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해마다 음력 8월 18일 무렵에 항주의 전당강에는 전강조(錢江潮)가 일어난다. 전강조를 구경하기에는 육화탑이 가장 좋다. 전강조는 바닷물과 전당강이 거세게 부딪쳐 엄청난 파도가 몰려오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이 특이한 자연현상에 신화와 전설을 만들어 풍성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소원을 빈다. 사람들은 전당강에 사는 용이 제물을 바치라는 강요라 생각하고 오래도록 여러 가지 행사를 열었다. 자연의 메카니즘에 대한 두려움은 종교 의식과 영웅을 낳았다. 종교적 바람이 육화탑이라면 영웅은 육화탑 뒤에서 활로 용을 쏘는 오대의 왕 전류와 수호지의 영웅 노지심과 무송이다. 전류는 힘차게 활을 쏘고 있다. 노지심과 무송은 당당한 대장부라기보다는 피안의 세계를 그리는 구도자의 표정이다.

수호전의 호걸 가운데 명궁 화영(華榮)과 열혈남아 노지심(魯智深), 그리고 의기남아 무송(武松)을 좋아했다. 노지심은 친구인 임충(林冲)의 아내를 겁탈하려고 하는 고관의 아들을 혼내주고 떠돌이 악사의 딸을 농락하는 푸줏간 주인을 때려죽인 후 출가승이 된다. 무송은 서문경과 밀통하고 형을 독살한 형수를 죽인 후 도망자가 됐다. 둘은 양산박에서 만나 항상 파트너로 용맹을 떨쳤다. 무송의 이야기는 중국식 에로소설 금병매(金甁梅)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훗날 양산박의 호걸들이 조정에 투항해 공을 세우는 과정에서 무송은 한쪽 팔이 잘라진다. 노지심과 무송이 벼슬을 마다하고 불교로 귀의한 곳이 육화사이다. 수호전이 인기를 끄는 까닭은 무엇일까?

문학은 작가의 상상력이 바탕이다. 인간은 실존보다는 상상의 세계에서 노니는 것을 더 좋아한다. 삼국연의와 마찬가지로 수호전도 북송 말년에서 명말 원초에 이르는 약 250년의 오랜 세월 동안 민간에 내려오던 설화를 시내암(施耐庵)이라는 작가가 집대성한 작품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가 노지심과 무송의 마지막을 육화탑으로 삼은 것은 소주가 출생지이고 항주는 벼슬을 살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시내암은 동향의 군주 주원장(朱元璋)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오직 수호전의 완성에 전력을 쏟았다. 농민폭동설, 송강(松江)의 투항설(投降說), 시정서민(市庭庶民)의 반란설, 충간설(忠肝說), 영웅설(英雄說), 악한설(惡漢說) 등 다양한 시각이 있으나 작가는 분명히 발분의 심정으로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정치권력에 의해 설정된 법과 그것을 시행하는 통치와 행정이 공정하지 못하고 민생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문인은 붓을 들고 항거한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문인의 붓은 천고에 남아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있다.

수호전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권력의 가렴주구에 항거한 108명의 의협들이 양산박으로 모이는 것이고 후반부는 조정의 사면을 받아 반란군과 요를 물리치는 내용이다. 모택동도 수호전과 삼국연의에 감동했다. 작가의 상상력이 사람에게 미치는 힘은 역사적 사실을 뛰어넘는 매력이 있다. 모택동의 정강산에 숨어서 장개석에게 항거할 때의 기분과 정강산을 출발해 연안의 동굴생활에 이르기까지 대장정을 이룰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양산박 호걸들에 대한 감동 때문이리라. 중국 공산당은 수호전을 농민혁명을 그린 것이라고 규정했다. 모스크바 유학파가 도시노동자를 공산혁명의 중추로 보는 것에 반대해 농민이 혁명의 중추세력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택동에게는 수호전이야말로 마르크스 레닌의 혁명교범보다 훨씬 중국적이었다. 송강이 끝내 투항하지 않았다면 중국 공산당의 훌륭한 교재가 됐을 것이다. 그 이유로 한때 후반부는 금서가 됐다. 사람들의 애석한 감정이 불문에 귀의한 노지심과 무송으로 남았다. 노지심은 전당강의 물소리를 듣고 입적했으며, 무송도 오랜 파트너의 뒤를 따랐다. 그 모습으로 두 영웅이 전당강을 바라보고 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