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항주 오산(吳山)은 성황산(城隍山)이라고 한다. 남송 소흥9년(1139), 봉황산에 있던 성황묘를 옮겼기 때문이다. 이 시기 성황노야는 손본(孫本)이었는데, 명의 영락(永樂) 연간에 주신(周新)으로 바뀌었다. 주신에 대한 민간전설은 포청천과 유사하다. 그는 억울한 백성들의 편에서 탐관오리들과 대항한 영웅으로 신화적 존재로 변해 절강일대의 신이 됐다. 사람들은 성황당을 찾아가 소망을 빌었다. 주신은 광동 남해 출신으로 영락원년(1403)에 감찰어사로 임명됐다. 황제의 친인척이나 귀족들까지 엄격하게 처벌해 냉면한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누구에게나 안면몰수하고 대든다는 의미이다. 쿠데타로 조카를 몰아낸 주체는 그를 신임했다. 1405년에 절강안찰사로 임명되자,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를 반겼다.

주신은 미리 민간의 사정을 살피다가 체포돼 옥에 갇혔다. 옥중에서 죄수들로부터 현관의 불법행위를 밝혀냈다. 다음 날 현관은 부하들을 이끌고 성문에서 주신을 영접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자, 현관은 감옥으로 가서 죄수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주신이 나서서 신분을 밝혔다. 놀란 현관이 사죄했지만, 주신은 그를 파면하고 처벌했다. 주신은 늘 백성들의 편에 섰다. 누군가 구운 오리고기를 보냈다. 주신은 그것을 대문에 매달고 가난한 집에서 자라 오리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물을 보낸 사람은 부끄러워서 다시는 주신을 찾지 못했다. 거절한 주신이나 부끄러워 한 사람이나 훌륭한 인품이 돋보인다. 작은 선물이 아니라 수많은 금품을 주고받고도 떡값이네 대가성 여부를 따지며 법적 판단을 내세우는 우리의 현실은 더 부끄럽다. 권력자에 대한 잣대는 법이 아니라 도덕이다.

주신에 관한 신화적 이야기도 많다. 두 사람이 우산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웠다. 주신은 우산을 둘로 나누어 절반씩 차지하게 했다. 관리를 시켜 뒤따라갔더니 갑이 을에게 말했다. “반값으로 내게 주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 아니냐?"

을은 왜 반값으로 주느냐고 따졌다. 관리가 두 사람을 도로 끌고 왔다. 주신은 갑의 죄를 물어 곤장 20대를 때리고 우산값을 물어주게 했다. 사람들은 주신에게 많은 신화를 덧붙이고 활판관(活判官)이라고 불렀다. 정변으로 제위에 오른 주체는 정국을 통제하기 위해 별도의 황제직속 감찰조직인 금의위(錦衣衛)를 설치했다. 비밀정보기관이었던 금의위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주신은 금의위에서 항주로 파견한 천호가 만행을 저지르자 그를 잡아 매질했다. 천호가 황제에게 하소연하면서 주신이 황제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고 무고했다. 노한 주체가 주신을 해임하고 죄를 물었다. 황제의 면전에서도 주신은 당당하게 천호의 죄상을 설명했다. 주체도 화가 나서 주신을 죽이라고 명했다. 죽기 전에 주신이 소리쳤다. “올곧은 신하를 죽이지만, 나는 귀신이 되어서라도 직언할 것이다.”

주신의 억울한 죽음을 두고 여론이 좋지 않았다. 항주 사람들은 그를 수호신인 성황노야로 받들었다. 명말의 장대(張岱)는 오산의 성황묘에 시를 남겼다.

지수지하용봉소(只愁地下龍逢笑) 소이기원우경명(笑爾奇寃遇經明)

좌대강조다냉면(坐對江潮多冷面) 지금원기미증신(只今寃氣未曾伸)

슬픈 마음으로 지하에서 용을 만나 우스개소리를 했더니,

웃음 속에도 원한이 서렸다는 것을 알았다네.

강물을 마주하면 수많은 주신이 보이는데,

지금까지도 억울함을 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과 싸울 수 있는 또 다른 권력을 두는 것은 권력의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측면도 있다. 주신이 신화로 남은 것은 그 기능을 다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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