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몽유도원도’는 조선 초기 최고의 화원 안견이 안평대군(1418~1453)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린 그림이다. 진(晉)나라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 풍모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안평은 이 그림을 하명하면서 앞으로 닥쳐올 참변을 예견하고 도원에서 살기를 염원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 그림은 아쉽게도 일본 천리대에 소장돼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걸린 그림은 모사본이다.

안평대군은 조선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둘째 형 수양대군에 저항하다 36세에 죽은 불운의 왕자였다. 청지라는 자(子. 淸之 초명)를 즐겨 쓴 그는 예술 감각이 뛰어난 천재였다. 글씨는 물론 시를 잘 지었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풍류를 좋아한 그는 또 가야금을 사랑했다고 한다. 

세종 29년 4월 20일 밤, 안평은 잠자리에 들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낯선 곳이었는데 골짜기가 나왔으며 한참을 들어가니 한 노인이 있었다. 노인이 알려준 곳으로 가니 놀라운 풍경이 나타났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있는 마을 동산에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었다. 사방에는 운무가 자욱해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꿈속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낀 안평은 이튿날 화원인 안견을 불렀다. 꿈 이야기를 한 뒤 그림을 부탁했다. 화원은 집으로 돌아와 사흘 밤 혼신을 다해 ‘몽유도원도’를 완성했다. 그림을 본 안평대군은 크게 감동했다. 손수 먹을 갈고 붓을 들어 화제(畵題)를 적었다. 

한국의 지명가운데는 무릉도원이라는 명칭이 들어간 곳이 많다. 봄철이면 복숭아꽃이 만발하는 도원경이 많기 때문인가. 실지로 이런 이름을 지닌 동네를 가면 몽유도원도와 같은 풍경이 연상된다. 

최근 중진 실경화가 오산 홍성모 화백이 영월군의 지원으로 ‘영월십경(寧越十境)’을 그린다고 한다. 홍화백은 이미 해원부안사계도(海園扶安四季圖)를 그려 부안군에 기증, 화제가 된 작가이다. 부안사계는 57m의 대작으로 현재 기네스북 등재 신청 중이다.

홍화백은 영월이 제2고향이라고 했다. 태백산 설경 스케치가 인연이 돼 농가 주택을 장만하여 30여년 영월을 오가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가 제일 먼저 꼽은 절경은 무릉도원면에 있는 법흥사. 영월 10경 가운데 제 1경으로 선정된 곳이다. 

필자도 지인들과 법흥사를 찾아 나섰다. 가을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쉬움이 컸던지 온통 붉고 노란색 나뭇잎들이 마지막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중첩의 사자산 계곡에 서린 운무는 안견의 무릉도원도를 연상시켜 주는 한 폭의 명화 같았다. 몽유도원이 여기 있었는데 안평은 세조의 칼날을 피해 이곳에 은거하지 못했을까. 

영월군은 산수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고장이다.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고 죽임을 당한 곳도 이곳(장릉)이다.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죄인임을 자책하고 시와 술로 산 방랑객 김삿갓도 이곳에 묻혔다.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이었던 이옥봉(李玉峰. 선조 때 인물)은 괴산현감에서 삼척부사로 임명받은 남편을 따라가는 길에 단종의 묘소에서 가마를 세웠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피해 갔을 무덤에서 비감에 젖은 여인은 단종을 애도하기 까지 했다. 그녀가 쓴 시 ‘영월도중(寧越道中)’ 또한 가슴시린 명작으로 회자된다. 

최근 관광 트렌드는 역사와 문화다. 영월군이 중진 한국화가에게 ‘영월십경’을 완성하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은 어찌 보면 예술을 사랑한 안평대군의 풍모를 연상시킨다. 침체된 한국화 중흥의 기회도 돼 화가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일본에 수장되었지만 한국의 예술혼을 빛내고 있는 몽유도원도를 능가하는 불후의 작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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