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문화칼럼] 청와대 비서들의 호통
[이재준 문화칼럼] 청와대 비서들의 호통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조선 유학 사상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뒤늦게 선조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선조는 율곡이 각종 과거에 급제(9도 장원이라 부른다)해 가장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어도 측근으로 기용하지 않았다. 말이 너무 과격하고 비위에 쓴 소리만 했기 때문에 꺼린 것이다. 그런데 율곡이 관직에서 물러나 조정에서 보이지 않자 찾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진정으로 쓴 소리를 해 줄 수 있는 측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황해도 해주에 숨어있던 율곡을 부른 것은 선조 6년 1573AD 율곡의 나이 37세였다. 

‘이 똑똑한 천재를 어떤 자리에  앉히면 좋을까’ 선조는 그를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 격인 승정원 동부승지(정3품)로 임명한다. 매일 매일 임금의 눈에 띄는 자리에 임명한 것이다. 율곡은 선조의 걱정과 기대대로 ‘기탄없는 승지’로 역할을 했다.

어떤 때는 ‘이게 나라입니까’라고 극간을 했다. 율곡은 1년 후 후대에 남을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바친다. 이를 만언소(萬言疏)라고도 불리는데 글자가 1만 2000자가 넘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상소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일까. 임금과 신하의 신뢰, 관리들의 책임감, 인재 등용, 재해 대책, 백성의 복리 증진을 지적한 것이다. 

오늘날 가장 큰 교훈을 주는 것은 율곡의 예리한 미래 진단이었다. ‘백성들의 원기(元氣)가 이미 쇠퇴해 10년이 못 가서 화란을 당한다’고 경고한 것이다. 율곡의 예언대로 조선은 임진전쟁으로 참담한 비극을 겪었다. 

율곡은 왜적의 침공에 대비,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 만언봉사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를 입증한 것이 역시 후에 도승지로 있던 이항복의 기록(수정 선조실록)이다. 선조는 율곡 생전에 일본이 침공할 수 있다는 경고를 알면서도 대비하지 못했다. 

승정원은 임금을 가장 근거리에서 모신 기관이었다. 수장 도승지는 정3품의 관리 중에서 임명했으나 그 힘은 막강했다. 때로는 정2품의 벼슬에 있는 신하가운데서 임명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조정 신료들의 시선이 모아지는 위치였으므로 각별히 행동을 조심했다. 이곳을 거친 인재들은 대부분 후에 국정의 요직에 기용됐다. 

현명한 군주는 도승지들을 엄선하여 임명했다, 그러나 실패한 왕들은 쓴 소리를 하지 못하고 비위만을 맞추는 간신들을 기용 파탄을 맞았다. 연산군이 포악한 왕이 된 것은 간신으로 기록 되는 임사홍(任士洪)을 도승지로 임명했기 때문이었다. ‘흥청망청’이라는 유행어를 남긴 임사홍은 아들 대까지 연산의 엽색행각을 도운 간신 중의 간신이었다.  

세종은 당대의 학자이며 글씨를 잘 썼던 안숭선(安崇善)을 도승지로 삼아 국정을 폈다. 역사상 최장수 도승지로 꼽히는 그는 인재기용 만큼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 시기 세종의 덕치를 도운 명 재상들이 많이 나왔는데 황희나 맹사성 등은 안숭선의 검증을 통과한 인물들이었다. 세종이 성군으로 칭송을 받은 데는 이런 도승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국감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이 야당 원내대표의 질의에 난데없이 끼어들어 고함을 지르고 또 호통을 치는 일이 발생,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야당은 정무수석의 ‘똑바로 하세요’는 제1야당의 원내 대표한테 자행한 폭력에 준하는 협박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대통령 비서실은 양지 보다는 음지에서 일해야 한다. 겸양의 미덕을 지니지 못하고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그 화살이 대통령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야당에 대한 호통보다는 율곡의 자세처럼 대통령에게 쓴 소리도 마다않는 진정한 참모들이 돼야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