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문화칼럼] 조선 여류 시인 옥봉의 한
[이재준 문화칼럼] 조선 여류 시인 옥봉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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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이옥봉(李玉峯)은 조선 선조 때 문명을 알린 여인이었다. 그녀가 시를 잘 짓는다는 소문을 듣고 안 당대 지식인들이 많다. 그녀의 시는 중국에 먼저 알려졌으며 연경에서 시집이 출간되기도 했다. 허난설헌, 황진이, 매창과 더불어 4대 시인으로 회자된다. 그러나 옥봉은 남편에게 내쫓기어 비참하게 살다 죽었다.

‘몽혼(夢魂)’은 그녀의 유작가운데 가장 사랑을 받는 시다. 이 시는 처연할 만큼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농축돼 있다. 

달빛이 창을 비추는 밤, 버림받은 여인의 한이 서린 그리움은 더욱 깊어진다. 잠이 들어도 님에 대한 그리움 뿐, 꿈속에서 얼마나 자주 찾아갔으면 발에 밟힌 돌길이 모래가 되었으리라는 표현을 했을까.   

옥봉 문학을 연구하는 한 학자는 ‘이옥봉은 허난설헌과 황진이에 버금가는 시인으로 호방할 때는 호방하고 섬세할 때는 섬세했으며, 아름다울 때는 아름답고 슬픔은 찬연하다’고 평했다.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이라는 것이다.  

옥봉은 비록 서녀 신분이었지만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매우 적극적인 사고를 지녔다. 그래서 신랑감을 선택하는 데도 조선 여인답지 않게 적극 대시했다. 장래가 촉망되는 멋진 사대부 조원(趙瑗)의 소실로 들어갈 각오로 부친과 조부를 졸라 중매를 서게 한다.

조원은 심성이 조심스러워 소실을 자청한 옥봉을 외면했다. 자칫 축첩에 대한 비판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양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옥봉을 소실로 받아준다.

남편은 청혼을 허락하면서 옥봉에게 다짐을 받았다. 그것은 다시는 시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친구들이 오면 옥봉을 불러 대작 하도록 했다. 출세 지향적인 조원이 보인 이중성이다.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게 될 백성들의 요청으로 관아에 보낸 시 한 수 때문에 옥봉은 남편에게 버림받았다. 다시는 시를 짓지 않기로 한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다. 길거리로 내쫓긴 옥봉은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원의 집 근처에 움막을 짓고 남편의 마음이 돌아서길 기다리며 비통한 삶을 살았다. 

같은 시기에 산 실학자 이수광(李睟光)은 자신이 지은 ‘지봉유설’에 시중에 떠도는 옥봉의 죽음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40여년 전 중국 해안 바닷가에 괴이한 주검이 떠올라 사람을 시켜 건져 올리도록 했다.

시체는 종이로 수백 겹 말려 있었고, 안쪽 종이엔 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시가 빼어나 책으로 엮었다. 말미엔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정말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죽음을 맞은 것인가. 일설에는 임진전쟁 때 희생됐다고도 한다. 

필자는 최근 옥봉의 육필 시로 보이는 한시 1수를 찾아 연구 중이다. 이 시는 옥봉이 평소 시를 공부했던 서책인 ‘소동파 시집’ 맨 뒷장에 종서 2행 초서로 썼으며 내용은 부군이 괴산현감으로 부임하자 기뻐하면서도 떨어져 있음을 애석히 생각한 내용이다. 특히 시 왼편에는 붉은 글씨로 ‘옥봉이 삼가 기술하다(敬述)’라고 적혀 있다. 

부군이 괴산현감으로 부임하자 떨어져 살았던 옥봉은 그리움에 넘치는 시를 적었다. 그 분량이 산더미 같았다. 그리고 마음은 괴산에 가 있으며 임을 생각하는 것이 하나의 허망 꿈에 불과하다고 한탄한 것이다.  

조선 사대부 사회의 비정함과 버림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남편을 사랑하고 그리워한 여인의 의리가 가엾기만 하다. 그녀가 태어난 충북 옥천에 ‘옥봉 문학관’이라도 지어 한을 달래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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