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덴노 헤이까 반자이’. 일제 강점기 일왕에 대한 충성 만세였다.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의 경우 처절한 자폭에 앞서 이 구호를 세 번 외쳤다. 그 시절 우리 한국인들도 신사참배를 강요받으면서 만세를 불렀다. 당시 소학교에 다녔을 80이 넘은 노인들에게는 유쾌하지 못한 기억 일게다.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즉위를 대내외에 알리는 의식이 지난 주 도쿄 지요다(千代田)에 있는 일왕 거처 고쿄(皇居)에서 국가행사로 치러졌다. 그런데 이날 식에서 아베 일본총리도 예복을 갖춰 입고 일왕 앞에서 ‘덴노 헤이까 반자이’를 세 번이나 외쳤다. 묘하게도 일본 제국주의의 망령이 아직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즉위식은 궁전에 있는 다카미쿠라(高御座)에서 있었다. 이 어좌는 8세기 나라(奈良)시대부터 중요 의식이 열릴 때 사용하던 이른바 ‘옥좌(玉座)’라고 한다. 히로히토(裕仁), 아키히토(明仁) 전 일왕에 이어 네 번째로 즉위식에서 사용됐다고 한다. 모양은 우리나라 옛 사찰에 많이 남아 있는 ‘닷집’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왕이 입고 있는 예복이 일본에 남아있는 7세기 인물인 쇼토쿠태자(聖德太子·574~622년) 상의 복장을 닮고 있다는 점이다. 관모나 들고 있는 홀(笏)을 보면 제왕의 모습이 아니다. 중국 황제나 조선 임금들이 즉위 시 입었던 의상은 황색 용문양이 장엄하게 수놓아 진 곤룡포였다. 

무령왕릉이나 전라도 지역 백제 고분에서 출토된 왕들의 관모는 모두 금제로 되어 있다. 화려한 당초문양이나 곡옥이 치렁치렁 장식된 관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일왕이 착용한 장신구는 흡사 신하의 모습이다. 관은 신라 문장가 고운 최치원이 쓴 사모 관을 닮고 있다. 고대 일본 천왕은 격이 낮아 스스로 금제 관모를 사용하지 못한 것인가.   

이날 즉위식에서는 ‘삼종신기(三種神器)’로 불리는 일본 왕가의 상징물인 거울, 칼, 곡옥(曲玉)을 넘겨받는 의식이 치러졌다. 고대 우리나라 귀족들의 고분에서 흔히 찾아지는 것이 바로 이 유물이다. 일본 고대 황실이 이 세 가지를 신기로 삼은 것은 바로 이들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도래한 귀족이란 점이다. 

30여년 전 국가연구기관의 원로 역사학자 한분이 청주를 답사, 필자를 만난 자리에서 극비에 부쳐진 발굴 얘기를 들려 준 적이 있었다. 남쪽 지역의 한 고분을 발굴했는데 일본 고대 철기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그 자리에서 덮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한반도 경영설인 임나부설을 입증하는 유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 유물들은 나중에 연구결과 일본보다 1백여년 앞선 것으로 판명돼 해프닝으로 끝났다. 역으로 한반도 철기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된 것을 입증하게 됐다.

지난 80년대 오사카부 하비키노에 있는 오진천왕(應神天王)릉의 주변 배총(陪塚)을 조사할 때였다. 그런데 고분에서 가야 계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진 것이다. 일본 정부는 오진천왕의 실체가 드러날까봐 발굴을 중지하고 서둘러 덮고 말았다. 이 사실만 봐도 오진은 한반도에서 도래한 인물이었다. 일본 고대국가를 형성했던 오진은 백제계였을까, 가야계였을까. 오진을 일본 내 일부학자들은 백제에서 한자를 전래해 준 왕인박사로 해석하기도 한다.  우경화로 치닫고 있는 일본은 재무장을 위해 헌법마저 개정하려고 하고 있다. 한국과의 우호관계를 깨뜨리고 혐한시위를 선동하고 있다. 

나루히토는 ‘국민의 행복과 세계의 평화를 항상 바라면서 국민에 다가서고, 헌법에 따라 일본과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임무를 다할 것을 맹세 한다’고 선언했다. 제발 일본 지도자들이 ‘덴노’의 교시를 잘 따랐으면 하는 마음이다. 재무장이야 말로 평화를 해치는 헛된 야망이자 비극의 단초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