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그리스의 시리자(SYRIZA, 급진좌파연합). 2004년 그리스의 급진적인 좌파정치세력 연합체로 출범한 이후 9년만인 지난 2013년 단일한 정치조직체로 창당했다. 그로부터 2년만인 지난 2015년 1월 총선에서 35.5%의 득표율로 과반에 육박하는 145석을 얻으며 처음으로 집권당으로 올라서는 돌풍의 주역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그리스와 집권 신민주당(ND)을 향해 긴축이 아니라 ‘인민의 삶’이 먼저라며 그리스 민주주의의 회복과 사회적 연대를 표방함으로써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당시 40세에 불과했던 치프라스(Alexis Tsipras) 시리자 대표는 총선 승리를 통해 그리스 역사상 최연소 총리에 올랐다. 젊고 건강한 정신에 더해 정치력까지 갖춘 그에 대한 기대는 생각보다 높았다. 젊은 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심취했고 체 게바라를 존경했던 치프라스의 등장에 당시 유럽사회에서는 그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로 부를 정도였다. 그렇다면 경제적 위기에 처한 그리스를 과연 40세의 급진좌파 치프라스 총리가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가운데 4년의 세월이 흘렀다. 

시리자, 전략의 부재와 전망의 불투명
지난 7일 그리스 총선이 실시됐다. 그리스는 당초 오는 10월 총선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난 5월의 유럽의회 선거에서 시리자가 23% 득표율로 참패하자 치프라스 총리가 총선을 앞당기는 승부수를 띄운 셈이다. 그러나 이런 승부수도 실패하고 말았다. 144석의 거대 의석을 가졌던 시리자는 31.6% 득표율로 86석을 얻는데 그쳤다. 반면에 제1야당이던 신민주당은 39.6%의 득표율로 158석의 과반의석을 얻는 대승을 거뒀다. 이로써 시리자는 집권 4년 반 만에 중도보수의 신민주당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시리자의 4년, 무엇이 결정적인 실패 원인일까. 이번에도 역시 경제 문제였다. 국제채권단의 압박과 국민의 요구 사이에서 정부는 중심을 잡지 못했다. 당초 긴축재정은 안 된다고 했던 치플라스 정부는 국제채권단의 압박에 끝내 굴복하고 말았다. 아니 이길 수도 없었다. 그렇다보니 그리스 경제는 여전히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며 돈이 돌지 않았다. 그 대신 치프라스 정부는 국민의 가처분 소득을 증가시키는 제도적 노력으로 보상하려 했다. 이를테면 세금 인하와 연금 인상, 동시에 최저 임금도 인상했다. 좋을 것 같았지만 경기가 회복되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경제적 양극화는 더 심화되고 좋은 일자리는 갈수록 더 멀어졌다. 치프라스 정부에 한 가닥 희망을 품었던 중산층은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상황이 4년 전보다 더 악화됐다고 보는 국민이 많았다. 치플라스의 시리자 정부가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2010년 재정위기로 국가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그리스는 EU와 IMF 등 국제채권단으로부터 3차례에 걸친 구제금융으로 그동안 힘들게 나라 살림을 꾸려왔다. 그 와중에 집권당이 된 치프라스 정부는 각고의 노력 끝에 구제금융을 받은 지 8년 만인 지난해 8월 졸업할 수 있었다. 이것은 치프라스 정부의 성과다. 그러나 채권단으로부터 엄격한 재정 감독을 계속 받아야 하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총선 때의 재정정책 공약을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치프라스 총리가 채권단에 굴복하더니 끝내는 국민에게도 외면당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구제금융 이후 거액의 부채상환과 채권단의 정책 개입은 이미 낯선 개념이 아니다. 그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치프라스 정부는 끌려가는 모습만 보이며 당장의 국민적 요구에 화답하는 소극적 정책으로 일관했다. 포퓰리즘 정책을 뛰어 넘는 새로운 국정운영 프레임을 만들지 못했다. 사실상 시리자의 첫 도전은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번 총선에서 과반의석을 확보한 중도우파의 ‘신민주당’ 대표 미초타키스(Kyriakos Mitsotakis)가 그리스 새 총리로 선출됐다. 그리스 정계의 명문가 출신인 미초타키스는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총리가 된 초유의 기록도 남겼다. 그러나 명문가 출신의 금수저 정치인이라고 해서 그리스 경제에 어떤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오랫동안 논란이 된 그리스의 유럽연합 탈퇴(GREXIT) 문제는 없던 일로 되겠지만 2059년까지 총 2947억 유로의 천문학적 부채상황은 이미 발등의 불이다. 부채가 많아도 너무 많다. 국내총생산(GDP)의 약 180% 수준이다. 게다가 국가신용 등급도 ‘투자’ 등급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구제금융 부채를 갚으면서 동시에 거액의 재정을 시장에 푼다면 그리스 경제는 급격한 화폐가치 하락과 함께 인플레이션 악화로 인해 더 큰 위기로 빠질 수도 있다.

미초타키스는 총선 승리 직후 “구제금융 이후의 고통스러운 긴축 악순환은 이제 끝났다”고 선언했다. 조만간 미초타키스 정부는 유럽과의 관계를 더 긴밀하게 하면서 채권단과의 협상도 본격화 할 것이다. 동시에 긴축을 다소 완화하는 조건에서 그리스 경제의 구조개혁에도 나설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공공부문 민영화 작업도 탄력을 받을 것이다. 줄줄이 해고 사태도 촉발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민심이 따라줄 것인가. 게다가 금수저 출신의 미초타키스 총리와 45년 이상의 정치적 기득권을 누려온 신민주당이 앞장서 그리스 경제의 체질을 제대로 바꿀 수 있을 지도 불투명하다. 그간 유럽의 경험을 보노라면 쉽지 않아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리자의 새로운 역할, 포퓰리즘 이후의 더 진화된 정책비전이 매우 중요하다. 낡은 개념으로 새로운 희망을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급진 좌파와 포퓰리즘을 뛰어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야 한다. 시리자는 지금 한 발 더 진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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