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담장 없는 박물관이라는 소흥(紹興)을 찾았다. 유명한 황주(黃酒)에 취하는 것보다 왕희지(王羲之)와 서위(徐渭 1521~1593)에게 취하고 싶었다. 서위가 아니었다면, 청등서옥은 소흥의 외진 골목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나와 성이 같다는 것도 작은 이유였지만, 고호를 닮은 삶을 영위한 그가 그리웠다. 400여년 전의 서위는 여전히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눈을 감고 지난날을 되새기는 것 같았다. 청년시절 그도 당당했던 시절이 있었다. 왜구토벌을 지휘하던 직절(直浙)총독 호종헌(胡宗憲)을 면접할 때, 삼베옷에 검은 두건을 쓴 일개 서생으로 방약무인하게 천하사를 논했다. 그가 지은 두 통의 백록표(白鹿表)를 읽은 가경제는 감탄했다. 600여자의 진해루기(鎭海樓記)로 은 120냥이라는 거금을 받았다. 작은 누각 하나를 살 수 있었다. 호종헌을 도와 왜구를 물리칠 때 여러 차례 기공을 세웠다.

때로는 물가의 바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발이 물에 잠겨도 굳이 끌어당기지 않았다. 그는 마음이 가는대로 살았다. 과거에 응시해 제목만 보고 몇 구절 적다가 공백에 시원하게 그림을 그렸다. 어떤 때는 대취하여 긴 글을 쓰기도 했다. 빈 곳이 없으면 글은 종이에서 탁자로, 의자로, 벽으로 이어졌다. 더 쓸 곳이 없어야 붓을 놓았다. 그러나 삶은 간단하지 않았다. 그의 후견인이었던 호종헌이 엄숭(嚴嵩)과 관련되어 피살되면서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하긴 처음부터 지독히 불우했다. 백일잔치도 치르기 전에 부친이 사망했다. 생모는 하녀였다. 모친은 곧바로 다른 곳으로 팔려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결혼하자 유일하게 그를 아끼던 이복형이 죽고, 곧바로 아내도 아들 하나만 남기고 그와 작별했다.

호종헌이 죽자, 서위는 화를 피하기 위해 미친 척했다. 송곳으로 귀를 찌르고, 망치로 낭심을 때렸다. 도끼로 머리를 찍고 피가 흐르면 소리를 질렀다. 간통했다고 후처를 죽였다가 하옥되기도 했다. 친구의 아들로 장원급제한 장원변(張元忭)이 구해주었다. 옥살이 7년, 8번의 낙방, 9번의 자살시도, 10번의 이사로 점철된 삶이었다. 죽기 한 해 전에 임진란이 일어나자 조선으로 출병하는 이여송(李如松)이 찾아왔다. 일본군에 대한 정보와 경험을 듣고 감탄한 이여송이 두둑한 돈을 주었다. 아무도 미친 그를 기억하지 않을 때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청등서옥을 마련한 그는 이제 긴 한숨도 짧은 탄식도 하지 않았다. 시서화에 뛰어난 재능이 발휘되었다. 어떻게 혹독한 삶을 산 그가 이렇게 단정한 글씨와 그림과 담담한 시를 지었는가? 어떻게 감정을 절제했는가? 근대 중국의 최고화가였던 제백석(齊白石)은 청등서옥을 지키는 개라도 되고 싶다고 했다. 유명한 문인 원굉(袁宏)은 그의 친구이자, 열렬한 팬이었다. 서위가 죽은 후, 그가 작품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서위문집에 서문을 지으며 통곡했다.

“그의 눈은 오랜 옛날부터 빛났던 것처럼 한 시대에 홀로 고고했다. 위세를 부리는 권세가나, 공연히 소란을 피우는 묵객들을 만나면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므로 결국은 아름다운 이름이 작은 고을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슬프다!”

만년에 서위는 청등서옥에서 유폐된 것처럼 살았다. 자기 정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결국은 죽은 후에야 명성을 얻었다. 그는 시의 요정이었고, 문장의 악마였다. 글씨의 협객이었고, 기음의 종사였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은 시공간을 무시했다. 청등서옥에서 나를 반기는 그는 현실적 존재였다. 그는 아직도 청등서옥을 지키고 있었다. 담벼락에 기댄 등나무 의자에 앉은 그가 말했다. “나는 여기를 떠난 적이 없다.”

소흥을 떠나기 직전에 다시 청등서옥을 찾았다. 월왕 구천도, 왕희지도, 육유도, 하지장도, 왕양명도, 주은래도, 채원배도, 노신도 모두 자기와 친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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