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종법제도의 기본 강령인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 등의 삼강은 소농생산경제체제를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사회질서였다. 정치적 등급과 종법적 등급은 지주계급의 통치에 필수적이었고, 일반인도 크게 심리적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순자는 묵자가 만물의 고른 점만 보고 특이한 점은 보지 못했으니, 그렇다면 정령은 소용이 없다고 꼬집었다. 또 천하통일의 필요성은 모르고, 공리와 실용을 앞세워 신분적 차등을 부인하는 것은 군주와 신하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한 헛소리라고 비판했다.묵자의 겸애(兼愛), 상현(尙賢), 절욕(節慾), 공리(功利) 등 사회준칙은 신흥지주계급의 사회질서를 위협했다. 겸애와 상현은 계급적 혈연적 멍에의 돌파가 목적이었으므로 가정 중심의 종법적 등급제도에 충격을 주었다. 지주계급의 통치는 가정이 생산단위인 소농경제가 기반이었다. 혈연적 유대가 중심인 종법제도는 생물학적 본능과 결합된 조직구조였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는 군주의 통치권과 혈연적 종통(宗統)이 결합된 관념이었으므로, 왕권과 가족권은 분리될 수 없었다. 맹자는 하늘의 근본은 나라에 있고, 나라의 근본은 가정에 있다고 주장하여 지주계급의 본질적 질서를 갈파했다. 맹자는 묵자의 겸애에는 아버지가 없다고 비판했다. 가족 중심의 종법제도가 기초인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위협한다는 의미였다. 묵자의 평등사상은 혈연적 문벌제도를 타파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능력에 따라 공직자를 등용하라고 요구하며 직접 봉건적 계급제도를 반대했다.

묵자가 대표한 소생산노동자의 요구는 물질적 이익의 균등한 분배와 공리주의 사상이었다. 이는 지주계급의 경제적 이익과 배치되었다. 지주계급은 자기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가치관을 내세웠다. 군자는 정의를 중시하지만 소인은 이익을 중시한다거나, 덕은 윗사람의 몫이고, 기술은 아랫사람의 의무라는 식이었다. 묵의 절용, 절장(節葬), 비악(非樂) 등 금욕주의도 신흥지주계급의 취미와 부를 이용한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와 맞지 않았다. 대동사회론도 일부의 정치적 열정과 신앙심을 자극했지만, 엄격한 생활방식은 모든 사람들이 갈구하는 삶의 목표가 아니었다. 고행과 극도로 검소한 생활은 수도자도 견디지 못하므로 보편적 사회심리와 맞지 않았다. 혁명 이후에도 처음에 열광하던 사람들이 혁명의 기조가 장기화되면 피로감을 느끼고 대열에서 이탈한다. 과도한 금욕주의는 사회적 지지를 지속적으로 얻지 못한다. 장자는 묵가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무시했다고 비판하면서 천하의 보편적 인심에 반하는 것은 누구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묵자는 고난의 감수를 요구했지만, 미래의 행복을 제시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그를 따르는 신도의 수도 감소했다. 묵가의 이상은 사후가 아닌 현실에서의 대동사회였지만, 그것이 언제 실현될 수 있는지는 선언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은 청빈하게 살다가 죽은 후에는 얇은 관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사후에 천당은커녕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물질적 보상은 물론 심리적 보상도 없었으니 묵자의 대동사회는 외면당하고 말았다. 살아서도 고통이요, 죽어서도 고통이라면 인생은 고통의 바다이다. 신앙심이 약한 신도들부터 현실의 고해를 견디지 못하고 이탈했다. 종교의 가장 큰 매력은 사후세계에 대한 확신이다. 사후의 천당에 매혹되어야 현실의 고통 정도는 감당할 수 있고, 오랫동안 응집력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 묵자는 사람들에게 고통만 강요했다. 사람의 자연적 물욕을 최대한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이익에 대한 욕망은 사회의 각 계급과 계층의 정치활동으로 격화된다. 묵가는 사회적 불평등을 용감하게 비판했지만, 그들의 삶을 고무시키거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보다 강력한 투쟁정신을 고취시키지는 못했다. 욕망은 양날의 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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