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명대의 유명한 문학가, 화가, 서예가였던 당인(唐寅 1470~1523)은 강소성 소주출신으로 자를 백호(伯虎), 백호(栢虎), 자외(自畏)라 했으며, 호를 육여거사(六如居士), 노국당생(魯國唐生)이라 불렀다. 축윤명(祝允明 1460~1527), 서정경(徐禎卿 1479-1511), 문징명(文徵明 1470~1559)과 함께 ‘오중사재자’라는 호칭을 얻었다. 풍류남아로 알려진 이 강남재자는 서화에 능했을 뿐더러 험악한 정치투쟁에서 멋지게 벗어난 것으로도 유명하다.

명태조 주원장은 제17자 영왕(寧王)을 대령(大寧)에 봉했다. 여러 아들 가운데 연왕(燕王)이 가장 모략, 영왕은 전투에 가장 뛰어났다. 연왕은 정난을 일으켰을 때 영왕을 북평(北平)으로 옮기고, 대령은 타안삼위(朶顔三衛)에게 주었다. 나중에 영왕은 다시 강서로 옮겼다. 홍치(弘治) 연간에 주신호(朱宸濠 1479~1521)가 제4대 영왕이 되었다. 그는 무종이 오락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는 것을 보고 쿠데타를 도모했다. 술사 이자연(李自然)과 이일방(李日芳)도 천자가 될 상이고, 남창의 남쪽에 천자의 기가 있다고 부추겼다. 영왕의 야심이 더 커졌다. 양춘서원(陽春書院)을 세우고 인재를 초빙했다. 소주에 살던 당백호도 초빙되었다. 착각한 당백호는 흔쾌히 응했다. 남창에 도착한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곧바로 실망했다. 영왕은 강도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깡패들이 그의 비호를 받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영왕부가 곧 불구덩이로 변할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도망쳐야 했다. 어떻게 몸을 빼낼 것인가? 미친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음식과 주거를 완전히 거꾸로 했다. 일부러 발광하거나 술에 취한 척 발가벗고 다녔다.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색정광처럼 여자만 보면 희롱했다. 영왕은 이 미치광이를 쫓아냈다. 당인은 평안히 고향 소주로 돌아왔다.

정덕14년(1519) 6월, 영왕이 반란을 일으켰다. 생일잔치를 명분으로 지방관들을 왕부로 초대하고, 반란에 동의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였다. 이어서 친히 배를 끌고 안경(安慶)을 공격했다. 순무도어사 왕수인(王守仁 1472~1529)은 먼저 주신호의 소굴 남창을 공격하여 주신호를 사로잡고 반란을 평정했다. 영왕이 초빙한 명사들은 모두 피살됐다. 당인만은 일찍 일찍 깨닫고 미친 척하며 살아남았다. 그는 소주의 도화오(桃花塢)에 집을 짓고 죽을 때까지 고향에서 살았다.

영왕은 그가 진짜 미치광이 서생으로 생각했다. 당인은 매우 총명했다. 겉으로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누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으로 뜻을 얻지 못해 늘 울적했다. 젊은 시절에는 친구 장령(張靈)과 어울려 방탕하게 지내느라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축윤명의 권고로 향시에 참가하여 1등인 해원(解元)을 차지했다. 나중에 과거시험장에서 문제를 사전에 유출했다는 오명을 쓰고 하옥됨으로써 평생 정치적 앞날이 단절되고 말았다. 처음 영왕의 초빙을 받은 그는 자기의 불우한 삶을 마무리하고 정치적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왕이 하는 짓을 본 후 재빨리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미치광이 짓으로 탈출했다. 과거시험장에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던 그는 반란의 와중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려면 미치광이가 되는 수밖에 없었지만, 보통 사람은 생각도 하지 못하게 행동해야 한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가는 기밀이 누설될 것이 두려운 영왕에게 피살될 수도 있었다. 말은 쉽지만 많은 눈을 속이는 것은 쉽지 않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야 하지만, 지나치면 의심을 받는다. 당인은 다행히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왔고, 반란이 평정된 후에도 연루되지 않았다. 문학가였지만, 당인은 교묘하게 정치적 도회지술을 펼쳐 노련한 정치가에 비해 손색이 없는 지혜를 과시했다. 소흥에서 왕수인의 묘를 참배하다가 문득 두 사람의 만남을 상상해보았다. 둘은 서로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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