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재욱 충남대 명예교수

 

나이가 들어가며 중학교나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참석해보면 친구들의 나이든 모습이 다양하다는 것이 바로 느껴진다. 겉모습에 따라 다른 친구들에 비해 나이가 더 많이 들어 보이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친구들에 비해 10년 이상 젊어 보이는 동창들도 있다. 그렇다면 10년 더 젊어 보이는 친구가 실제로 또래들보다 10년 이상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일까.

세상에 태어나 세월이 흐르며 몸에 간직되는 생물학적 나이는 연령과 같은 것이 일반적이지만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노화(老化)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도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지내왔느냐에 따라 겉모습이나 노화 정도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는 세월의 흔적이 유전자만이 아닌 일상생활이나 식습관 등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무줄기에 그 나무의 수령을 나타내는 ‘나이테’가 있는 것처럼 사람의 염색체에 간직돼 있는 유전자(DNA)에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유전자 나이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유전자 나이테에 새겨진 나이는 ‘후성 나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나무의 수령을 나이테를 통해 계산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연령도 유전자 나이테의 분석을 통해 추정이 가능한 것일까.

나무의 수령을 나타내는 나이테는 줄기의 절단면에서 쉽게 관찰이 가능하지만 분자 수준에서 관찰이 가능한 유전자 나이테는 육안으로 관찰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유전자를 분석하는 분자생물학적 기법이 발달하며 후성나이의 측정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유전자 나이테의 실례로 말단소립이라고 부르는 ‘텔로미어(Telomere)’를 들 수 있다. 텔로미어는 염색체의 말단에 특정 염기서열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부위를 일컫는 말로 세포분열 시 유전자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텔로미어는 체내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세포분열 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잘려나가는데, 텔로미어가 일정 크기 이하로 짧아지면 세포분열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해 수명이 다한 세포가 죽으며 노화가 진행된다.

인류의 적으로 불리고 있는 암세포는 일정한 수명을 지니고 분열하는 정상세포와 달리 죽지 않고 무한정 분열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암세포는 세포분열 과정에서 텔로미어가 잘려나가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2009년에 블랙번, 쇼스택 그리고 그라이더가 텔로미어와 텔로미어를 신장시켜주는 텔로머라아제라는 효소의 존재와 기능을 밝힌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하기도 했다. 이는 그들의 연구가 인류의 주요 관심사인 노화나 암과 같은 후성 유전 현상 규명을 위한 유전학적 단서를 마련한 공로로 인정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전체를 일컫는 게놈(또는 유전체, Genome)에 간직되어 있는 유전자들은 특정 원인에 의해 언제 어떻게 작동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발현될 수 있는데, 이런 현상은 후성 나이에 영향을 주는 ‘후성 유전’이라 부른다. 유전자 나이테와 연계되어 있는 후성 유전은 DNA의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 특정 유전자가 환경의 영향을 받아 발현 여부가 결정되는 유전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후성 유전으로 인해 유전자 발현에 이상이 생기면 당뇨, 암, 치매, 심혈관계 질환 또는 정신분열증 등 다양한 질병이 유발될 수 있다. 자신이 선택하는 습관이나 경험 그리고 환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후성 유전의 작동 방식은 자손들에게도 유전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유전자 나이테로 세포 내에 남겨지게 되는 후성 유전의 흔적을 분석하면 실제 나이와 신체 나이를 나타내는 후성 나이의 비교가 가능하다. 후성 나이는 실제 나이와 일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조로증(早老症) 환자에서처럼 ‘연령의 가속화’ 현상이 생기면 후성 나이가 더 많게 나타날 수 있다. 연령의 가속화가 일어나는 사람에게는 암이나 심혈관 질환과 같은 질병의 발생률이 높게 나타날 수 있는 반면에 연령의 가속화가 늦추어지면 노화가 지연되며 장수에 이를 수 있다.

이제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 ‘유전자 나이테’에 대한 상식을 바탕으로 장수 비결 중 하나인 연령 가속화의 속도를 낮추는 생활습관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리고 ‘후성 나이’에도 관심을 가지고 노화를 늦추며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한 유전자 나이테 가다듬기에 나서볼 것을 제안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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