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일본 전통도자기를 대표하는 것이 아리따(有田)와 사쓰마(薩摩)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도자기 산업을 중흥 시켜 유럽에 팔아 대단한 이익을 얻었다. 그런데 두 도자기의 원류를 상고하면 매우 아이러니하다. 아리따, 싸스마 모두 한반도에서 납치된 도공들이 도조(陶祖)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도조’란 도자기의 조상, 신(神)을 지칭하는 것이다.

임진전쟁 당시 한반도에 침입한 왜군들은 경상남도 웅천에서 도자 가마를 만나게 된다. 이때 텅 빈 가마에서 흩어진 도자기를 보는 순간 왜군들은 놀라고 말았다. 주인을 잃은 노란 색깔의 막사발을 보고 넋을 잃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그릇이 여기에….’

왜군들은 인근 산간에 숨었던 도공들을 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다. 울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가족들을 모두 데려간 경우도 있었다. 왜군들은 가마에서 획득한 한 점의 가장 아름다운 막사발을 통치자인 도요테미 히데요시(豐臣秀吉)에게 헌납한다. 막사발을 진상 받은 그는 감탄하고 이를 소중히 간직했다. 이 막사발이 지금 수천억을 호가한다는 일본 국보 이도다완(井戶茶碗)이다. 또 전북 남원을 지나는 왜군들은 검은 색의 도자기를 굽던 가마를 급습했다. 가마에서 새까만 색깔의 도자기를 발견한 이들은 ‘티엔무(天目)가 아닌가?’하고 감탄했다.

일본은 과거 송나라에서 수입된 자기 일종인 천목자기를 매우 사랑했다. 당시에도 엄청난 가격에 거래됐다. 일본 군인들은 남원에서도 많은 도공들을 납치했다. 이때 끌려간 도공이 바로 일본 ‘사쓰마’의 도조가 되는 심당길(沈當吉)이다.

일본 군사들은 계룡산 입구에서는 더 귀족적인 도자기 가마를 발견했다. 바로 하얀 분을 발라 철화로 아름다운 문양을 구현하는 분청사기 가마였던 것이다. 도자기 장인 이삼평(李參平)은 이때 일본군에 끌려갔다. 이삼평은 아리따의 도조가 됐다. 

그 후 일본에 끌려 간 도공들은 어떤 대우를 받은 것일까. 전쟁이 끝난 후 사명대사는 일본에 건너가 포로송환 교섭을 한다. 그런데 돌발사고가 발생했다. 당연히 고국으로 돌아 갈 줄 알았던 도공들이 귀국을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일본은 잡아온 도공들을 기술자로 예우하면서 잘 살 수 있도록 했다. 도공들을 천시하고 평생 노예처럼 노동을 강요한 조선과는 달랐다. 조선의 웅천, 계룡산 남원 등 가마에는 기술자들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들 가마는 이후로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일본 사쓰마 도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기가 됐다. 조선의 도예기술과 장인정신이 창조한 도자예술을 완성시켜 완전 일본화를 이루었다. 일본국민은 물론 세계에서 사쓰마 도자를 사랑하는 인구가 많다. 

심당길의 14대손 심수관(본명 오사코 게이키치이)이 며칠 전 세상을 떠나 일본 문화계가 애도하고 있다. 그는 조상의 나라 한국을 무척이도 사랑한 이다. 필자도 30년 전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함께 여러 곳의 가마타를 답사한 적이 있다. 

현재 한국의 전통 도자기 재현 사업은 침체일로를 걷고 있다. 광주 분원도 그렇고 이천도 그렇다. 계룡산 인근 식당에서 분청사기 재현품으로 식탁을 꾸민 경우는 찾기 힘들다. 값싼 중국도자기 등 외국도자기가 들여져와 수요층을 지배하고 있다. 

몇 년 전 필자는 충북 오창의 한 전시장에서 계룡산에 가마를 가지고 있다는 한 도예작가의 개인전을 관람 할 수 있었다. 자기는 매우 아름다웠으며 계룡산 분청자기의 장점을 살린 매우 훌륭한 예술품이었다. 그런데 관중은 없었고 구매하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 이 도예작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전통예술가를 극진히 대접하며 우리역사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야 한다. 이들이 일할 수 있는 창작 공간을 만들어 줘야 한다. 가난 세습의 처우부터 해결해 줘야 한다. 임진전쟁 이전의 천시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잘 나가는 기업들이 지원해야 하고 지자체장이, 장관이, 대통령이 앞장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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