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얼마 전 경북 울진군 성류굴에서 신라 진흥왕대의 명문이 찾아졌다고 해서 언론이 흥분한 적이 있었다. 신라 북방 공략의 영주였던 진흥왕대 기록이라면 당연히 기뻐할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 찾아진 기록은 여러모로 의심이 가는 부분이 많다.
우선 진흥왕 560년이라고 한 묵기부터가 문제가 된다. 이 시기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든지 아니면 신라연호를 써야 한다. 지금까지 찾아진 금석문을 보면 왕 생전에 이런 호칭을 쓴 예가 없다. 진흥이란 호칭은 왕 사후에 받은 시호가 된다. 그러면 누가 이런 기록을 동굴 속에다 만들어 놓은 것일까.
진흥왕은 생전에 화랑을 만든 장본인이다. 처음에는 원화를 조직해 스스로 경쟁토록 했는데 그만 이 제도가 실패했다. 원화였던 남모, 준정이 서로 다투다 그 하나가 상대를 죽인 것이다.
원화제도는 시련을 만나게 된다. 진흥왕이 다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화랑이란 제도였다. 왕은 진자대사(眞慈大師)를 불러 화랑이 될 만한 재목을 널리 구했다. 대사는 여러 곳을 헤매다 웅천(熊川)에서 미모가 수려한 소년을 만난다. 왜 진자대사는 아름다운 소년에게 마음이 꽂힌 것일까.
삼국사기 미시랑(未尸郞)조에는 소년에 대한 기록이 소략하다. 아마 소년은 무예 솜씨가 남달랐을 가능성이 있다. 진자대사는 소년의 늠름한 태도를 보고 그가 장차 신라를 구할 미륵의 화신, 즉 화랑재목으로 보았을 것이다. 진자대사는 소년에게 간청해 아름답게 치장시켜 그를 궁중으로 데리고 갔다. 이것이 화랑의 효시가 된다.
화랑들은 대개 15세가 되면 무리들을 데리고 다녔다. 엄밀히 따지면 화랑들에게 적게는 4~500명에서 많게는 천수백명의 낭도들이 따랐다. 이 조직이 국가 유사시 대단한 용기로 무장된 결사 조직이 된 것이다.
진흥왕은 대 신라 백제와의 전쟁에서 화랑도를 이용했다. 처음 소백산을 넘어 한강유역을 점령했을 때도 이들을 앞세웠다. 남한강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화랑들이 수 없이 전사한다. 진흥왕은 가슴이 아팠다. 그 영혼을 위로할 방법은 없을까.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에 절터가 있다. 바로 마을 이름대로 ‘외사(外寺)’다. 삼국사기 진흥왕조를 보면 왕은 외사에서 죽은 화랑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팔관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흥왕 사후 백여년 신라 화랑조직은 김유신 장군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15세에 화랑이 된 김유신은 여러 전쟁을 통해 신라군의 새로운 강자로 군림했으며 김춘추와의 동맹으로 그 지위가 더욱 공고해졌다.
김유신은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만노군(진천)태수로 부임하면서 진천에서 태어난다. 진천읍 상계리 태령산은 장군의 태를 묻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화랑이 되기까지 15년간을 무예를 닦으며 성장했다.
광혜원 화랑벌, 노은면 장수굴, 만노산, 도당산성, 농다리 등 진천에는 화랑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노은 장수굴은 가장 주목되는 곳으로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김유신이 소년시절 중악석굴에 들어가 수련을 했으며 이곳에서 보검을 얻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이곳으로 비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석굴 옆에는 커다란 삼국시대 미륵보살상이 우뚝 서있으며 수련자들의 주거 유적도 찾아졌다.
지난 주말 한 사회단체가 주관하는 김유신장군 유적지 순례가 진천에서 이루어졌다. 신라 화랑정신을 체득해 굳건한 안보관을 확립하자는 취지였다. 나라의 안보 틀이 흔들리면 국가의 위기를 불러온다. 원화와 진천 화랑의 역사를 통해 다시 한번 호국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