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문화칼럼] 자치단체 개념 없는 강사료
[이재준 문화칼럼] 자치단체 개념 없는 강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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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조선시대 서원이나 향교에서는 음력 2월과 8월 석전제를 치르고 향음 주례 한 후 강론하는 풍속이 있었다. 때 마침 그 고장에 내려온 학자가 있으면 특별히 초청해 강론을 부탁하고 주식(酒食)을 함께 했다. 

조선 명종 때 속리산에 은거했던 성운(成運)은 지리산에 사는 학자 남명 조식(南溟 曺植)을 초청한다. 그가 일주일 걸려 찾아오자 성운의 제자들이 몰려들고 보은, 옥천에 살던 선비들이 강론을 듣기 위해 몰려왔다. 

선조 때 청백리이며 명신이었던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은 광해군 즉위 초 인목대비의 폐위에 항의하다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 그런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숙하는 곳에 많은 유생들이 몰려들었다. 

백사를 위하는 의미도 있지만 그로부터 강론을 듣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젊은 선비나 기생들이 보답으로 가져 온 것은 약재나 주식 정도였다. 백사는 이것을 받고도 감동해 친필로 시를 적어주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는 생전에도 명필이자 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가 1840년 제주도로 귀양을 가는 길마다 유숙하는 곳에는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출발한 날자는 9월 3일이었다. 추사는 며칠 후 전주에서 글을 잘 쓰는 창암 이삼만과 만났다. 보름 후인 9월20일께 고창군 흥덕현-하오산마을-반암마을(병바위)-선운사-무장현을 지났다. 9월 25일에는 해남 대흥사에서 초의선사를 만나고, 9월 27일 완도에서 제주로 가는 배를 탔다. 9월 27일 저녁 귀양지인 제주도 대정현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제주도를 가는데 무려 24일이나 걸렸다. 

그런데 추사의 귀양길은 서법(書法)을 전수 하고 해박한 지식을 가르친 특별한 강론의 여정이었다. 지방수령들은 추사를 지방 사족들의 사랑방에 거처케 했다. 추사가 묵는 집에는 많은 유생들이 찾아와 강론을 들었다. 

추사는 젊은 선비들에게는 공부하는 자세나 필법도 써주고 주인에게는 주련(柱聯. 기둥이나 벽에 써 붙이는 글씨)이나 휘호를 주어 고마움에 답했다. 전북 고창, 해남에서 추사의 유묵이 자주 찾아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잠깐의 인연으로 평생 추사를 스승으로 삼았던 선비도 있다.

추사의 제자 대원군 이하응은 난(蘭)을 잘 그린 예술가였다. 불우했던 시절 괴산 화양서원을 찾아가 난을 쳐 주고 주식이라도 해결했으면 했다가 그만 만동묘를 지키는 수복(守僕. 묘를 지키는 하인)에게 두들겨 맞았다. 만동묘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 신종과 의종을 배향한 사당이다. 

대원군이 하인의 부축을 받고 계단을 오르자 수복이 무례하다고 구타한 것이다. 대원군은 이 모욕을 잊지 않고 나중에 만동묘는 물론 전국의 수많은 서원들을 철폐하고 말았다. 

막걸리에 식사 정도 대접을 하던 것이 상례였던 유교사회의 강론 풍속이 현대에 들어 한 시간에 수백만원 혹은 천만원에 가까운 고액 특강으로 변질 됐다. 요즈음 지방자치단체나 기업, 대학에서는 인기강사들을 초청하는 것이 유행처럼 돼 있다. 연간 억대 수입을 올리는 명강사도 있다. 

최근 대전 대덕구에서 개그맨 출신 김제동씨를 90분 특강에 1550만원을 책정했다가 여론이 나빠지자 취소하는 해프닝을 빚었다. 김씨에게 책정된 시간당 강사료는 775만원이다. 김제동씨의 강사료가 문제 되는 것은 바로 재정적으로 열악한 대덕구청이 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당 8350원을 받는 알바자리도 지금은 많이 줄었다. 사업 실패로 전기료나 월세를 내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극빈 가정이 얼마나 많은가. 진정한 위민(爲民)이 어떤 것인가를 공직자들은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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