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보한재 신숙주(保閑齋 申叔舟)는 세조~성종 때 학자다. 그는 임종 직전 성종에게 극간을 한다. ‘왜국과는 반드시 선린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신사로 왜국을 돌아보고 귀국했던 보한재는 왜 이 같은 유언을 한 것일까.

“그들은 습성이 굳세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능숙하게 쓰고 배 부리기에도 익숙합니다.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을 진무(鎭撫)하기를 법도에 맞게 하면 예를 갖추어 조빙(朝聘)하지만, 법도에 어긋나게 하면 곧 방자하게 노략질을 합니다...(중략)...”(신죽주 해동제국기)

‘해동제국기’는 왜국을 돌아보고 쓴 기행문이다. 신숙주는 누구보다도 왜국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었다. 임진전쟁을 겪은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은 ‘징비록’을 기술하면서 신숙주의 간언을 언급하기도 했다.

조선 건국 후 가장 중요한 대외 문제는 왜구의 해결이었다. 이들은 고려 말부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해변마을을 노략질하고 문제를 일으켰다. 서해, 남해안에 침입해 행패를 부린 왜구에 대한 나쁜 인상을 가진 조정은 일단 이들에게 친화책을 썼다.

투항한 왜구에게는 토지·집 등을 주고 여자와 함께 살도록 했다. 또 일정한 곳에 와서 상업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들의 수는 증가했지만 규제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일부 왜인들은 경상도 각 포구에 정박해 조선 해군의 군사 기밀까지 정탐 했다.

당시 보평역(報平驛)과 부산포의 부산 진성 일대가 가장 번성한 무역장소였다. 이곳에는 멀리 한성부 상인들도 몰려들었다. 일본인 들은 상술은 뛰어나 부를 축적한 이들이 많았으며 3~4년씩 머물며 장사를 했다. 그런데 삼포(倭館)가 문제가 됐다. 조선 속의 치외법권 지구로서 양 국민이 만나고, 교류하는 교역지대였다. 그런데 삼포왜인들의 풍속이 문란해지자 조선 조정은 강공책을 썼다.

‘상인이 다른 나라에 산다는 것은 지금까지 듣지 못했으니, 매매가 끝나면 일본인은 즉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인은 방안에 뱀을 기르는 것과 같아, 반드시 독을 마구 뿜을 날이 있을 것이다’

이들을 퇴출시키려 하자 격분한 삼포왜인들은 1510년 4월 대마도주의 아들 소(宗盛弘)를 대장으로 삼아 4~5천명의 폭도들을 이끌고 부산을 공격했다. 조정에서는 군을 편성하여 이들을 진압하였다. 그 결과 난동을 주도한 대마도주의 아들은 피살되고 왜인들은 모두 도주하여 난은 평정되었다.

삼포왜란이 발발한지 82년 후. 1592년 3월 27일 일본은 총 15만 8700명에 달하는 군대를 9개 군으로 나누어 출격시켰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선봉 1만 8700명의 제1군은 13일 오후 5시쯤에 부산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7년 동안 조선반도가 입은 전쟁의 피해는 미증유였다. 조선은 일본의 기습적인 침공을 눈치 채지 못하고 당하고 말았다.

‘방안에 뱀을 기르는 것과 같고 반드시 독을 내 뿜는다’고 경계한 조선의 일본에 대한 경계가 맞는 것일까. 일본 아베정부는 한국정부에 대해 무역보복을 시작했다. 양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조치다. 일본 국내 주요 언론들도 비판적이다.

한국 경제계가 입는 타격은 심각하다고 한다. 급소를 맞은 정부가 패닉상태에 빠져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일 간 갈등, 증오의 역사는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한국은 일본을 이길 방법과 기술을 빨리 찾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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