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7)
[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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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873년(고종 10) 명성왕후(明成王后)는 최익현(崔益鉉)에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퇴진상소를 올리도록 유도했는데 당시 흥선대원군이 추진했던 경복궁(景福宮) 중건 사업이 민생을 도탄에 빠뜨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던 점을 이용해 그의 실정(失政)을 들어 탄핵케 하고, 고종(高宗)도 22세로 친정할 때가 됐으니, 흥선대원군은 섭정(攝政)을 거두고 퇴진하라는 내용의 상소였다.

이와 관련해 고종이 성년(成年)이 되자 계속 섭정할 명분을 잃은 흥선대원군은 결국 조정(朝廷)에서 물러나고 말았는데 국왕으로서 친정(親政)을 하게 된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운현궁(雲峴宮)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통하던 출입문을 폐쇄시켰으며, 상소를 올렸던 최익현은 제주도로 귀양 갔다.

바로 이 무렵부터 흥선대원군과 명성왕후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됐으며, 그가 물러난 이후 조정은 명성왕후의 친정(親庭) 오빠가 되는 민승호(閔升鎬)를 비롯한 여흥민씨(驪興閔氏) 세력이 장악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명성왕후는 1874년(고종 11) 훗날 순종황제(純宗皇帝)로 즉위하는 아들을 소생하였으며, 1875년(고종 12) 2월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됐다. 

그로부터 2년후인 1876년(고종 13) 2월 강화도에서 일본과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맺게 됐으며, 그로 인해 제물포항의 개항에 이어서 그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됐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시작으로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甲申政變), 1894년(고종 31) 갑오동학혁명(甲午東學革命)이 발생하는 등 조선의 정국은 긴박하게 전개됐으며, 결국 1895년(고종 32) 명성왕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시해(乙未弑害)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고종은 을미시해가 발생한 이후 일제에 의해 경복궁에서 연금됐으며, 신변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다.

그 첫번째 사건이 춘생문(春生門)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 1895년(고종 32) 11월 28일 이범진(李範晉)이 주도(主導)하고 이완용(李完用),이윤용(李允用),윤치호(尹致昊),민상호(閔商鎬) 등이 협력하여 고종황제를 경복궁에서 벗어나게 하여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고 추진한 사건이었다.

이와 관련해 시종(侍從) 임최수(林最洙)와 참령(參領) 이도철(李道徹)이 중심이 돼 동별영 군사를 이끌고 춘생문을 통해 경복궁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동별영 군사는 궁궐 수비군이 지키는 춘생문을 뚫지 못하고 궁궐 진입에 실패하였으며, 임최수와 이도철은 이 사건으로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졌다.

춘생문 사건은 관련자가 누설하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데 고종은 대한제국(大韓帝國) 선포 이후 춘생문 사건으로 인하여 희생된 임최수,이도철에게 충민공(忠愍公)의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1901년(광무 5) 임최수,이도철은 장충단(獎忠壇)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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