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10)
[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1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907년(융희 1)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파견된 세 특사의 활동자금은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내탕금(內帑金)에서 2만원이 지원됐으며, 블라디보스톡에서 김학만(金學滿)과 정순만(鄭淳萬)이 한인들로부터 모금해 1만 8천원을 전달했다.

세 특사는 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마침내 1907년(융희 1)6월 24,25일경 헤이그에 도착했으며, 헐버트 박사는 특사들과 동행하지 않고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파리를 거쳐 비슷한 날짜를 전후하여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와 관련해 특사들은 헤이그에 도착해 시내의 융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태극기(太極旗)를 게양한 다음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 백작과 개최국인 네덜란드의 외무대신 후온데스는 물론 미국,프랑스,중국,독일 등 각국 대표를 방문해 도움을 청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세 특사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영국의 언론인 스테드가 주관한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었는데 즉석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처지를 동정하는 결의안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동정일 뿐 근본적인 상황을 바꾸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점인데 특사들은 통분을 금치 못하였으며, 일제의 침략과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앞서는 국제 현실에 대한 분노,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무기력에 대한 절망감, 특사로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였다는 자책감을 느꼈으며, 며칠후인 7월 14일에 특사단의 일원(一員)이었던 이준(李儁) 열사(烈士)가 현지(現地)에서 장렬하게 순국(殉國)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편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로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황제(純宗皇帝)가 즉위했으며, 그로부터 3년이후 대한제국이 국권(國權)을 잃게 되었으며, 고종황제는 1919년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에서 붕어(崩御)하기 전까지 유폐생활(幽閉生活)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황제를 베이징(北京)으로 망명시켜 항일운동(抗日運動)의 구심점(求心點)으로 삼으려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일제는 이를 “조선보안법위반사건(朝鮮保安法違反事件)” 이라 하였는데 구체적인 사건 경위를 소개한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1915년 3월 이상설(李相卨)을 비롯하여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조성환(曺成煥), 류동열(柳東說), 이춘일(李春日), 유홍렬(劉鴻烈)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상해 영국조계 서북천로 학숙에 모여 조직기구.임원선출을 완료하고 규칙과 취지서를 작성하면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결성했다. 

신한혁명당의 조직은 본부와 지부로 구성되었는데 본부는 베이징 서단패루 김자순(金子淳)의 집에 설치하였으며, 본부장(本部長)에 이상설이 추대됐다. 

지부는 우선 중국에서는 상해, 한구, 봉천, 장춘, 안동, 연길,에 두고 국내에서는 서울, 원산, 평양, 회령, 나남에 두어 책임자를 선출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