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9)
[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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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고종황제(高宗皇帝)는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외교권(外交權)이 박탈된 이후에도 여러모로 은밀한 외교를 전개해 각국 원수에게 일제의 비도덕적인 행동에 대해 호소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7년(융희 1)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알게 된 고종황제는 특사 파견을 결정했다.

이와 관련해 만국평화회의는 각국의 군비확장을 제한하고 전쟁 방지를 목적으로 이미 1899년(광무 3)에 제1차 회의가 열린 바 있었다.

1907년(융희 1)에 개최된 제2차 회의는 러일전쟁 이후 국제 분쟁의 위험성이 커지면서 전쟁 방지를 위해 열린 것인데 회의에는 세계 주요 국가의 대표들이 참석했고, 같은 기간에 그곳에서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도 열리고 있었다.

고종황제는 일제의 한국 침략상을 고발하여 국제 여론을 환기하고, 대한제국의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기에 유리한 기회라고 보고 특사를 파견하였던 것이다.

특사와 관련해 주목할 점은 고종황제의 지시에 의해 미국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던 헐버트도 특사로 동행하기로 해 1907년(융희 1) 4월 초순 헐버트는 먼저 서울을 출발하였으며, 이준(李儁)도 며칠 늦게 떠나 망명중이었던 이상설(李相卨)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합류해 일행은 시베리아 철도에서 러시아제국의 도시인 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그해 6월중순께 그곳에 도착한 그들은 전(前)러시아 주재공사((駐在公使) 이범진(李範晉)과 그의 아들 이위종(李瑋鍾)을 만나 세 특사의 진용을 갖췄다.

세 특사는 전(前)러시아 주한공사(駐韓公使)를 역임했던 베베르와 바파로프 등의 주선으로 러시아 외무대신과 황제를 만나 대한제국의 입장과 주장을 협의했으며, 고종황제의 친서(親書)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에게 전달됐다.

한편 세 특사가 가지고 간 고종황제의 신임장과 각국황제 및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친서는 1907년(융희 1) 덕수궁(德壽宮)에서 4월 20일자로 국새(國璽)와 고종황제의 수결(手決)이 찍힌 백지위임장(白紙委任狀)이었는데 그것은 고종황제가 특사들을 대단히 신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종 문서에 내용이 그 사용시기마다 알맞게 작성되어야 하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한 당시 고종황제가 통감부(統監府)에 의하여 사실상의 유폐(幽閉)되다시피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위임장에 내용까지 작성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친서는 상동교회(尙洞敎會) 전덕기(全德基) 목사의 이질녀(姨姪女)인 김상궁(金尙宮)이 지밀내인(至密內人)으로 있었던 관계로 비교적 대궐(大闕)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는데 결국 김상궁이 전덕기 목사에게 친서를 전달했으며, 이를 최종적으로 이준 특사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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