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8)
[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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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춘생문(春生門) 사건에 이어서 두 번째로 추진됐던 사건이 1896년(건양 1)에 발생했던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는데 여기에 관여한 핵심적인 인물이 있었으니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의 생모였던 엄귀비(嚴貴妃)인데 아관파천이 어떤 사건인지를 설명하기 전에 엄귀비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생애를 소개한다.

엄귀비는 1854년(철종 5) 서울에서 엄진삼(嚴鎭三)의 2남 2녀 중 장녀로 출생했는데 8세 때 입궁해 궁녀가 됐으며, 명성왕후(明成王后)를 최측근에서 보필하는 지밀상궁(至密尙宮)까지 이르렀으며, 결국 1885년(고종 22) 승은(承恩)까지 입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명성왕후로부터 견제를 받아 궁에서 쫓겨났다가 을미시해(乙未弑害) 이후 불과 5일 만에 고종의 명(命)에 의해 다시 입궁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을미시해는 국모(國母)가 시해당한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사건이었으나 공교롭게도 이 사건으로 명성왕후에 의하여 쫓겨났던 엄귀비가 다시 입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고종의 명(命)을 받고 다시 입궁한 엄귀비의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아관파천이었다.

아관파천은 을미시해 이후 1896년(건양 1) 2월 일제로부터 늘 신변의 위협을 느꼈던 고종과 왕세자를 엄귀비의 주도면밀한 책략(策略)에 의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시킨 사건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경복궁 문을 자주 드나들어 경비로 하여금 방심하게 하여 놓고 극비리에 가마를 이용하여 고종과 왕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당시 조정은 친러내각이 출범했으며, 이로부터 엄귀비가 1년간 고종을 시중드는 가운데 임신하게 돼 1897년(광무 1) 10월 20일 영친왕이 덕수궁(德壽宮)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체류하고 있는 사실에 각계각층에서 환궁(還宮)을 요청하는 상소가 이어졌으며 그러한 상소를 수용하여 1897년(광무 1) 2월 20일 덕수궁으로 환어(還御)했다.

1897년(광무 1) 10월 12일 고종은 마침내 원구단(圓丘壇)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8년 후인 1905년(광무 9) 11월 22일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외교권(外交權)이 박탈당했으며, 고종황제(高宗皇帝)는 극비리에 외국의 황제들에게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무효로 하여 줄 것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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