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5)
[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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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고종(高宗)은 즉위할 당시 12세였으므로 조대비(趙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됐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하여금 모든 국정을 관장케 하고 뒷전으로 물러났다.

흥선대원군은 무엇보다도 먼저 안동김씨(安東金氏) 가문(家門)의 세도정치(勢道政治)를 없애고 남인 계열의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어 실추된 왕권(王權)의 권위(權威)를 회복하고 과감한 개혁정책(改革政策)을 추진했다.

구체적으로 당파(黨派)와 문벌(門閥)을 초월해 조정에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한편, 전국에 산재한 서원(書院)중에서 47개소만 남기고 철폐(撤廢)했으며, 양반과 토호의 면세 전결을 철저히 조사해 국가재정(國家財政)을 충당했다.

또한 잡세를 없애고 진상제도(進上制度)를 폐지했으며, 은광산 개발을 허용했고 더 나아가서 사회의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해 양반도 세금을 부담하게 하는 파격적인 제도를 실시했다.

한편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를 부활시켜 삼군부(三軍府)가 군국기무(軍國機務)를 맡게 하여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을 비롯해 양전편고(兩銓便攷)와 육전조례(六典條例) 등의 법전(法典)도 편찬했다.

이와같이 흥선대원군은 과감한 개혁정책의 실시로 세도정치를 타파하는 등 여러가지 성과를 거두었지만 한편으로는 쇄국정책(鎖國政策)을 펼침으로써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집권 초기에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경복궁(景福宮) 중건을 계획하고 착수했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구체적으로 쇠약해진 왕권의 권위를 회복하고 중흥의 기세를 올려 보자는 것이었는데 1865년(고종 2) 4월 경복궁을 착공했는데 이러한 중건 공사는 정치 사회의 개혁과 병행해 진행됐다.

이와 관련해 많은 인력·재력이 소요되는 경복궁의 중건은 흥선대원군과 같은 과단성 있게 추진하는 인물이 아니고는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경복궁 중건을 위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관민(官民) 차별을 두지 않고 원납전(願納錢)을 자진 납부하게 했으며, 특히 많이 납부한 사람에게는 벼슬을 주기도 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솔선수범해 공사에 참여했다.

그런데 원납전만으로도 부족하여 전세를 올리고 도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세까지 부과했다.

그러나 이러한 원납전이나 전세만으로도 공사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당백전(當百錢)까지 과도하게 발행해 화폐가치는 폭락하고 물가가 올라 백성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66년(고종 3) 3월 영건공사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목수간 800여칸과 다듬어 놓은 재목 전부가 소실되어 인부들이 크게 놀랐으나 흥선대원군이 공사를 강행하여 강원도, 함경도 등 깊은 산중에서 성황당(城隍堂)의 거석대목과 양반 세력들의 거센 반발을 물리치면서 까지 묘소(墓所) 보호림(保護林)까지 벌채해서 사용토록 했으니 공사에 대한 그의 집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 흥선대원군이 강력하게 추진했던 경복궁 중건 공사가 착공한지 3년 후가 되는 1868년(고종 5) 7월에 준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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