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6)
[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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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866년(고종 3) 3월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대부인(閔大夫人) 민씨(閔氏)의 주선으로 고종(高宗)이 민치록(閔致祿)의 딸과 운현궁에서 가례(嘉禮)를 올렸다.

민치록은 숙종(肅宗)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부친 민유중(閔維重)의 5대손이었는데 경기 여주에서 출생한 민자영(閔紫英)이 왕비(王妃)로 간택된 것은 8세 때 부모를 모두 여윈 고아였고 그의 모친의 가문도 한미했기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에 의해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 3대에 걸쳐 60여년의 세도정치 폐단을 겪었기 때문에 이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외척이 적은 여흥민씨(驪興閔氏) 가문에서 왕비를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명성왕후가 입궁했을 때 당시 15세의 고종은 이미 영보당(永保堂) 이씨(李氏)를 총애(寵愛)하였기 때문에 명성왕후는 역사서를 읽으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866년(고종 3) 프랑스가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순교한 선교사 9명에 대한 보복으로 그 해 10월 군함 7척에 병력 1천명을 거느리고 강화도를 점령하였으며, 결국 제주목사 양헌수(梁憲洙)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시켰으니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한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871년(고종 8) 4월 2개월 전 대동강을 거슬러 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면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침몰된 사건에 대해 책임을 물어 미국이 군함 5척에 병력 1200명,함포 85문으로 무장해 셔먼호에 대한 배상과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에 침입해 조선군은 미군에 기습공격을 했다.

이러한 사건의 여파로 미군은 조선군에 보복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면서 평화협상을 제의했지만 조선군이 거부하자 미군은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초지진에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이 훈련도감(訓練都監) 이하 각 병영의 군대 수백 명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급파돼 광성진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미군을 맞아 싸웠으나 이 전투에서 어재연은 장렬히 전사하였으며, 미군도 맥키 중위 등 3명이 전사하였으며 결국 강화도를 점령하였는데 이를 신미양요라 한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지 1개월이 지나서 흥선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는 등 강력한 쇄국정책을 실시하자 미군은 결국 강화도에서 철수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과 통상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이것은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결과로 귀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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