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머무는 시] 주걱 - 류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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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걱

류인서

나의 손에 손목 잡힌 얄따랗고 단단한 슬픔입니다.
손거울 보듯 들여다봅니다.
누군가요? 유령처럼 눈 코 입이 없는 이 얼굴은.
얼굴이 아니면
손가락 없는 손바닥, 발가락 없는 발바닥.
손가락 대신 발가락 대신 몇 개의 현을 빌려준다면 그의 몸 비파족(族)의 악기라도 될까요.
울림통이 없으니 들리지 않는 노래 될까요.
듣지 못하는 귀 될까요.
젖은 그의 손목을 놓친 적이 있습니다.

 

[시평]

주걱은 밥을 풀 때 사용하는 것으로 여느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구이다. 밥은 주로 여인들이 짓고 또 푼다. 남자들도 밥을 짓기도 하고 푸기도 하지만, 밥을 짓고, 또 밥을 퍼서 밥상을 차리는 것이 여성의 일이라고, 우리들 삶에서 통상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걱은 여성이 살아가며 늘 만지고 또 사용하는 도구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매일같이 들고 밥을 푸는 주걱, 그 주걱을 들고 밥을 푸려고 하다가, 이게 도대체 무언가 하며 그 주걱을 들여다본다. 매일같이 들여다보는 손거울인 양, 그저 들여다본다. 그 주걱에는 눈도, 코도, 또 입도 없는, 마치 유령 같은 얼굴이 하나 비춘다. 이 얼굴은 과연 누구인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얼굴이 아닌 얼굴이 비추는, 아니 비추어야 하는 주걱.

그럼 주걱에 비추는 것이 얼굴이 아니면, 손가락이 없어 손으로서, 발가락이 없어 발로서 제대로 쓸 수도 없는 그런 존재가 바로 주걱의 본 모습이라는 말인가. 아, 아 마치 비파의 몸통 마냥 생겨 먹었으니, 이 주걱에 현(弦)을 빌려주면, 아름다운 소리라도 낼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주걱은 슬프게도 울림통이 없다. 그래서 아름다운 소리도 낼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매일 같이 이 주걱을 들고 들여다보고, 또 이 주걱을 사용해야 하는 나는 과연 무엇인가. 얼굴인가, 손인가. 발인가, 아니면 울리지도 못하는 비파인가. 그래서 이내 젖어버린 그 주걱의 손목 놓쳐버리고 만다. 놓쳐버린 것이 아니라, 그냥 놓아버리고 만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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