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문화칼럼] 백제 미륵사 오층탑 복원 감회
[이재준 문화칼럼] 백제 미륵사 오층탑 복원 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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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전북 익산시에 미륵사지가 있다. 익산 왕궁리는 백제 별도(別都)였다고 전해진다. 신라 선화공주와 백제 왕자 서동(무왕)의 로맨스가 얽힌 미륵사는 우리 민족의 설화에서 가장 재미있으며 아름답다. 

백제 서동은 익산에서 마를 캐는 총각이었다. 그가 적국인 서라벌 왕도에 들어가 미모의 선화공주에 반해 동요를 지어 불렀다. 선화공주가 몰래 정부를 숨겨두고 밤마다 안고 잔다는 노래였다. 동요가 아이들에게 불리게 되자 왕궁은 발칵 뒤집어 졌다. 신하들이 왕에게 극간해 선화공주는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공주가 궁을 나오자 서동이 기다리고 있다가 절을 하며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보디가드 서동은 결국 공주를 신부로 삼는다. 용감한 서동은 공주를 익산 사자산으로 데리고 왔으며 뜻밖에 금광을 발견해 나중에 왕위에 올랐다는 줄거리다. 

미륵사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자 무왕의 아내인 선화공주 발원으로 지은 것이라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그런데 지난 2009년도 미륵사 탑 해체 중 사리공에서 나온 금판경(金板經)에는 창건주가 백제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기록돼 있었다. 선화공주설화가 뒤집어진 당혹스런 발견이었다.

사택적덕은 부여 귀족 계급이었다. 사택씨는 부여박물관에 있는 사택지적비(沙宅智積碑)로 유명하며 이 가문이 백제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비는 일제강점기 현 부여읍 구아리 왕궁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다. 

부여 사택씨의 원류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사씨(沙氏)’는 공주 동성왕시기부터 등장하며 일본서기에도 기록된다. 그런데 사씨는 미륵사지 금판경에 등장하는 ‘사택씨’와는 다르다고 본다. 필자는 사택씨가 동성왕시기(공주) 신라에서 왕에게 시집을 온 아찬 비지의 딸과 함께 따라온 서라벌 육부의 하나인 사탁부(沙   部) 일부 집단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사택(沙宅)은 ‘사탁’으로도 쓰며 신라 이름인 것이다. 그러니까 공주로 이주해 온 동성왕의 사돈이 되는 아찬 비지 가문(사탁부 소속)이란 생각이 가능하다. 이들은 동성왕 사후에도 무령왕과 아들 성왕에 의해 특별히 비호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성왕이 부여로 천도한 이후에는 왕궁 인근에 살게 된 것이 아닐까.

서동의 로망은 서라벌이 아닌 부여 사택부 사람들이 살던 곳이어야 부합된다. 서동은 법왕(法王)의 서자(庶子)로 소년 시절 익산에 숨어 살며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가 사택부 마을에 들어가 아름다웠던 적덕의 따님과 몰래 야합해 이들 세력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니었을까. 

선화공주는 미륵신앙의 화신인 미륵선화에서 따온 것이며 적덕의 따님에게 이 이름이 가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륵사는 미래불의 출현을 염원해 창건 된 가람이다. 미래불은 현세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절대 능력자다. 미륵사가 창건되는 시기 백제와 신라는 전쟁의 와중에 빠져 있었다. 무왕은 백제 역대 왕 중 가장 많은 신라와의 전쟁을 치렀다. 백제의 염원은 전쟁 종식이었다.

사택적덕의 따님은 성품이 인자해 전쟁의 공포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미륵사를 창건했다. 무왕은 자신이 자라온 익산에 별궁을 짓고 국가적 대역사를 단행했다. 미륵사의 탄생은 백제 국력의 과시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시멘트 벽에 의지해 지탱되던 미륵사 5층석탑이 완전 복원돼 채양막을 벗었다. 1천 4백년 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비극적인 전쟁 종식을 염원했던 선화공주, 민족화해의 열망이 담긴 탑이어서인지 감회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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