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문화칼럼] 우국 기녀의 항일 의거
[이재준 문화칼럼] 우국 기녀의 항일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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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인 1937년 금강산에서 30대 젊은 기생이 일본 헌병에게 피살당했다. 일설에는 그녀가 비밀리 독립운동을 하다 죽음을 당했다고 하며, 일본헌병의 난행을 피하다 화를 입었다고도 했다. 

기생의 이름은 지춘홍(池春红)으로 교양미가 있었으며 음악을 잘했다고 한다. 그것은 지춘홍이 기생들을 교육시키는 권번(券番)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생이 생전에 중국인 화가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으며, 후에 죽음을 안 남자는 평생 그녀를 가슴에 넣고 살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중국인 화가는 과연 누구였을까. 근세 중국인 화가로 가장 위대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고(故) 장대천(張大千, 1899~1983) 화백이다. 그가 1927년 일본 회사에 근무했을 당시 한국에 출장을 와 금강산에 머물면서 지춘홍을 만난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동거하며 사랑을 나눴다. 장화백이 마음을 뺏긴 것은 그녀의 서화에 대한 지식과 뛰어난 기예 때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다. 장대천은 그녀와 결혼하려 했으나 본국의 모친이 강하게 반대해 중국으로 데리고 가지 못했다. 나중에 지춘홍이 일본 헌병에게 피살됐다는 소식을 들은 장화백은 죄책감과 슬픔에 빠졌으며 평생 그녀를 가슴에 넣고 살았다.  

지난해 중국 유명 옥션에서 160억에 경매된 장대천 화백의 그림 ‘천녀산화(天女散花)’는 돈황석굴 벽화에 그려진 비천(飛天)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장 화백은 지천홍의 얼굴을 비천에 대입시켰다. 한시도 잊지 못하는 연인과의 비련을 장화백은 이렇게 명화로 남긴 것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기생들 가운데는 독립운동에 간여하거나 비밀리 독립군을 돕다가 죽음을 당한 이들이 많다. 3.1운동 때는 기생들도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외쳤다. 

그중 가장 많은 규모의 기생들이 참가한 만세사건은 수원 시위로 알려져 있다. 기생의 선봉은 김향화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자 김향화를 위시한 20명의 어린 기생들은 소복에 나무비녀를 꽂고 대한문으로 나가 통곡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매일신보에 대서특필됐다.

이해 3월 1일, 서울에서 촉발된 독립만세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3월 19일에는 진주에서 기생들이 태극기를 선두로 촉석루를 향해 시위행진하다 6명이 구금됐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 33명의 수원 기생들도 만세에 동참키로 결의했다. 기생들은 거사 일을 3월 29일로 잡았다. 화성행궁의 봉수당에 세워진 자혜병원으로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던 날, 수원 경찰서 앞에서 이들은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절규했다. 

체포된 김향화와 기생들은 고초를 겪었으며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1918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는 ‘조선미인보감’에 수원기생들의 사진을 실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수원 기생들의 뚜렷한 생전 모습이어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이제 며칠 있으면 3.1운동 1백주년이 되는 날이다. 여성가족부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담은 달력을 만들어 화제를 모았다.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노력과 활동을 재조명하고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천시 받고 살았던 옛 기생들. 일제강점기 한 떨기 꽃처럼 스러지면서도 독립을 외치며 항거한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올해는 고 장대천 화백과 세기의 염문을 뿌린 애국지사 지춘홍의 역사도 빛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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