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문화칼럼] 탈북 여성들의 눈물 외면 말라
[이재준 문화칼럼] 탈북 여성들의 눈물 외면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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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북한을 탈출해 중국 대륙을 떠도는 사람들이 무려 20만명이 된다는 통계가 있다. 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 등 중국 동북 3성에 살고 있는 탈북자들 중 여성은 70~80%나 된다고 한다.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출했지만 이들의 삶은 다음 세대에까지 불행을 대물림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을 탈출해 만주로 이주한 많은 동포들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고려, 조선 공녀들의 비극적인 삶과 비슷하다. 

공녀(貢女)는 원나라 지배하에 고려 여성들이 겪었던 참담하고 눈물겨운 역사다. 원의 고려 간섭이 대략 1백년이었다. 공녀의 숫자가 많을 때는 한 해 5백명에 이르렀다니 몇 만명이 되는 셈이다.  

제1차 여·몽 전쟁 후 원나라는 고려에 동녀를 요구했다. 몽고 장군 살리타이(撒禮塔)는 사자를 보내 동남·동녀(童女) 각 천명을 헌납하라고 요구했다. 패전국의 쓰라린 수모가 첫 번째로 여자 헌상이었던 것이다. 

고려는 처음 진귀한 보물을 보내면서 동녀는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원의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이들은 남송(南宋) 관리와 군인들 가운데 아내가 없는 사람들을 결혼시키기 위해 거세게 고려 여인들을 요구한 것이다. 기록을 보면 고려가 머뭇거리자 융화책으로 납폐물(納幣物) 까지 보냈다고 한다. 

이 시기 왕도 개경의 가정에서는 우는 소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공녀로 끌려가면 가족과는 영원한 생이별이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 징발된 부녀들은 독신녀이거나 역적의 처 혹은 파계한 승려의 딸들이었다. 

그런데 원은 한 사람당 비단 12필의 자장료(資粧料)를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장료는 여인들의 화장값이라고 한다. 민가에서는 딸을 숨기거나 일찍 결혼시키는 조혼 풍속이 생기기도 했다.  

원나라가 망하고 명(明)이 들어 선 후에도 공녀 요구는 계속됐다.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에는 조선 공녀의 일화가 기록되고 있다.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는 태종 8년(1408) 사신을 보내 권씨(權氏), 임씨(任氏), 이씨(李氏), 여씨(呂氏), 최씨(崔氏) 등 5명을 후궁을 삼았다고 한다. 영락제는 일설에 그가 고려 공녀 아들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세종대왕시기에도 공녀 차출이 있었지만 명나라의 요구를 거역 할 수 없었다. 

중국에 사는 탈북여성들은 대부분 인신매매를 통해 한족 농촌 총각이나 홀아비들과 강제로 결혼해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이들 여성들이 낳은 자녀들마저 비극을 대물림 받고 있다는 점이다. 가난은 둘째 치고 국적이 없어 의료혜택이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일부 탈북여성들 가운데는 자녀들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건너오기도 한다. 

한국에 온 여성들은 직업을 찾아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으나 자녀들을 데리고 오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눈물로 살고 있다. 또 북한에 두고 온 부모형제들과의 생이별도 가장 큰 아픔이다. 실지 자살 충동을 느끼는 탈북여성들도 있다. 

이들이 유엔이나 세계 인권단체에 중국에 남아있는 자녀들 문제를 호소하지만 해결방법이 없다. 정부도 이런 실정을 알고도 북한이나 중국에 일체 함구하고 있다.

현 정부는 ‘사람이 먼저’라고 공언한다. 중국 대륙을 떠돌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현대판 공녀, 탈북 여성들과 자녀들의 인권보호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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