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문화칼럼] 신라초기 개국사 밝혀야 한다
[이재준 문화칼럼] 신라초기 개국사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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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백제 초기역사나 신라 초기 국가의 탄생을 기록보다 약 2~3백년 뒤로 잡는다. 단 하나밖에 없는 삼국사기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방이후 백제 고도 한성지역이나 신라 초기국가 유적인 사라(斯羅), 혹은 조양동 유적에서 무수한 초기철기시대 유적이 나왔어도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입장에 있다. 

신라는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BC 57년을 전후, 육촌(六村)의 태동과 더불어 초기 국가의 틀을 갖춘다. 서라벌 경주. 그렇다면 2천년 전 이곳에 이주한 사람들은 어디를 가장 적합한 장소로 삼은 것일까. 고대인들은 살기 좋은 곳을 선택 할 때 물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 다음이 외부의 적이 침입했을 때 방어 할 수 있는 언덕이 필요했다. 바로 취락과 방어의 요지가 입지조건이었다. 

삼국유사에 매우 주목되는 기록이 있다. 즉 육촌 중 알천양산촌(閼川陽山村)의 이씨가 내려온 것은 표암봉(瓢岩峯.금강산 록)이며 배씨(金山加里村)가 내려온 것도 금강산이라고 돼 있다. 명활산 고야촌의 촌장 호진(虎珍. 습피부 설씨)도 처음에는 금강산에 내려와 살다 거주를 옮겼다. 이밖에 돌산 고허촌 정씨는 형산(兄山), 모량부 손씨는 이산(伊山. 皆比山)에 거주했다. 

금강산은 지도에 ‘소금강산’이라고 표기된다. 강원도 금강산과 중복돼 소금산이라고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곳에는 이씨, 배씨, 설씨가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해발 180m가 되지 않는 구릉으로 앞에는 북천(알천)이 흐른다. 초기철기시대 인구가 밀집 될 수 있으며 일단 외적이 침입 했을 당시 산으로 올라가 방어 할 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이들 1개 성씨 집단의 호수가 약 1만호가 된다고 기록했다. 1가구당 5명 정도라고 가정한다면 3개 집단의 인구수는 15만명이 되는 셈이다. 알천이 북천의 언덕에 올라 육촌장을 위시 자제들과 협의해 국가의 새로운 수장을 결정했다. 이 회의가 화백회의 효시가 된다.

박혁거세를 옹립할 때 육촌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우리들이 위로 백성을 다스릴 군주가 없는 까닭에 모두 방종해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하니 어찌 덕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고 나라를 세워서 도읍을 두지 않겠는가.” 

그동안 신라 건국사를 입증 할 많은 유적들이 발견됐으나 가장 중심 지역이었던 소금강산에 대한 본격 학술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신라 건국사를 입증하지 못한 이유다.  

금강산은 우리말로 ‘쇠 벼리’ 산이다. 쇠를 달구는 산이라는 이름에서 금강산(金剛山)으로 표기된 것인가. 정밀조사를 하면 고 신라 철기유적이 많이 찾아지리라는 기대를 해 본다. 금강산과 멀지 않은 동네 ‘사라’라는 지명도 혹시 쇠벼리에서 연유한 것은 아닌지. 이곳에서는 청동기 철기등 초기 신라사를 입증할 유물들이 쏟아진바 있다. ‘사라(斯羅)’는 신라(新羅) 이전의 이름으로 뜻은 같다. 

표암 동산에서 옥고개를 지나 산 정상으로 오르는 능선에는 숱한 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다. 초기 철기시대 북방계인 석곽묘군(石槨墓群)의 잔해가 지상에 노출돼 있다. 원형으로 쌓은 토루의 건물지는 북방 계통의 초기철기시대 집 자리로 보인다. 신라 육촌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알천 양산촌 무리의 유적일 수 있다. 

5천년도 아닌 2천년 역사도 하나 입증하지 못하는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고속도 건설이나 각종 개발 때만 구제 발굴에 치중하는 안이한 태도로는 숨겨진 진실을 찾지 못한다. 대통령은 가야사를 본격 발굴해야 한다고 했다. 세계문화유산인 경주지역 신라초기역사 규명도 절실하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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