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②] 3.1운동 주도 민족대표 33인… 종교계 연합전선의 빛과 그림자
[3.1절 100주년②] 3.1운동 주도 민족대표 33인… 종교계 연합전선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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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천지일보 2019.2.19
민족대표 33인의 모습. ⓒ천지일보 DB

1919년 3월 독립선언서 발표

조선독립 앞에 하나된 종교계

교리 떠나 종교 간 화합 이뤄

 

종교계 이끈 중심은 ‘천도교’

3.1운동 이면엔 ‘교파주의’도

교단 부흥 위해 업적만 내세워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인 1919년, 33인의 종교지도자는 ‘민족의 독립’이란 대의 앞에 종교와 사상을 초월해 하나가 됐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화합의 정신 하나만으로 종교계가 손을 잡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3.1운동의 의미와 정신에는 ‘비폭력’ ‘평화’ ‘화합’ 등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명분에 가려진 이면을 들여다보면 각 교단, 교파는 명예를 위해 자신들의 업적을 내세우기에 급급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과연 종교지도자들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어떻게 손을 잡게 됐을까? 대의명분 아래 내세워진 교파주주의의 배경은 무엇일까.

‘조선독립’이란 대의 앞에 하나된 종교계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 한 식당 태화관에서는 역사적인 ‘3.1독립선언서’가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됐다. 민족대표 33인은 모두 종교지도자들이었는데 그도 그럴것이 당시 한일병탄과 함께 시작된 일제 탄압으로 국내 종교계 이외에는 조직적인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3.1운동을 이끈 전체적 조직의 중심은 ‘천도교’였다. 3.1운동 모의 초기 단계인 1월 20일, 천도교 지도부는 독립운동 3원칙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으로 정했다. 당시 의암 최병희가 이끈 천도교는 교세와 재정이 탄탄했다고 알려졌다.

천도교는 동학혁명 경험이 있는 종단이었고 당시 천도교 인구는 300만에 달했다.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책임자들이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천도교는 하나의 종단만으로는 민족운동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당시 독립운동 하던 사람들 다수가 이미 해외로 빠져나간 상황이라 운동을 위해서는 함께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천도교는 먼저 개신교 측 남광 이승훈에게 독립운동을 함께하자고 요청했다. 불교의 경우 당시 만해 한용운 스님을 합류시킨 후, 남원에 있는 백용성 스님까지 합류시켰다. 교리 문제로 이견이 없지 않았지만, 결국 ‘조선독립’이라는 대의 앞에서 합의를 이뤄냈다.

이렇게 개신교인 16인, 천도교 15인, 불교계 2인 등 모두 종교인으로 민족대표 33인이 구성됐다. 이들은 질서를 비폭력의 원칙으로 제시하며, 비폭력 평화정신을 상징하는 직접행동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들 대다수는 후에 징역 2~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뤘다. 후에 3.1 운동을 조직해 거족적 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이들 33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평가는 여기서 나온다.

이들은 나라 안팎에서 ‘기개’와 ‘저항’의 시발점 구실을 한 장본인들이었다. 해방 후에는 건국훈장 등을 받으며 민족자존의 표상이 되기도 했다.

◆이면엔 ‘교파주의’ 자리해

천도교,·기독교, 불교가 연대해 3.1운동이란 거대한 운동을 폭발시켰지만 그 이면엔 연대와 협력 정신에 어긋난 ‘교파 중심주의’의 움직임도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교단의 부흥을 목적으로 업적만 내세우려 한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3.1운동을 다룬 대부분의 책을 보면 민족대표를 배출한 숫자에 따라 개신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 순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천도교계에서 나온 책에서는 순서가 다르다. 천도교 15인, 감리교 9인, 장로교 7인, 불교 2인으로 천도교가 가장 많은 민족대표를 배출한 것으로 맨 앞에 나온다. 개신교를 두 교파로 분할했기 때문에 이러한 순서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으로 천도교가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이 부각된다.

개신교 계통의 책에서도 이와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대부분의 개신교 통사에서는 개신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만약 교파까지 표시할 경우엔 장로교 7인, 감리교 9인을 표기해준다.

숫자가 많은 감리교가 장로교보다 먼저 표기돼야 하는데 왜 이같이 배치했을까? 이는 한국 개신교사에서 장로교가 압도적 교세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나타난 장로교 중심주의 현상이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장로교가 주도적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도 장로교를 무의식적으로 앞에 배치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감리교에서는 민족대표와 관련해서 자신이 1위임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실제 감리교에서는 3.1운동 당시 피검된 개신교인의 숫자를 제시하며 ‘절대 숫자는 장로교인이 많지만 신자 비율로 보면 감리교의 피검자 비율이 높다’는 통계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같이 현재 거대종교로 존재하고 있는 개신교 사이에서 3.1운동과 관련한 업적을 위해 자신이 수행한 역할 이상으로 과장하는 경우가 발견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교계 내 뿌리 깊게 스며든 분파주의로 인해 종교계가 진정 하나 되지 못 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박남수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회’ 상임대표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개신교는 그때부터 분파적인 작동을 많이 한 종단”이라고 지적하면서 “장로교는 장로교대로, 감리교는 감리교대로 대표로 참여하려고 해서 양측이 서로 통합이 안됐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아울러 박 대표는 “독립선언서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를 향해 있다”며 “오늘날에 이르러서 진짜 평화라고 한다면 우리의 평화만을 얘기할 수는 없다. 아시아의 평화, 나아가서는 전 인류의 평화가 와야 우리 국민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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