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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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3.1운동은 일제 군홧발에 짓밟혔던 민중이 들고 일어난 민족 해방운동이었다. 3.1운동은 본격적인 항일독립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의 발단이 됐다. 3.1운동 이후 지속적인 독립의지 전파를 통해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은 한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배경과 성과를 정리했다.

자주 독립 염원 담긴 ‘선언서’

 

“섬은 섬으로 반도는 반도로” 무력 불사 ‘대한독립선언서’
일본 본토에서 외친 ‘2.8독립선언서’… 3.1운동 계기
종교적 예언 담고 민중봉기 도화선된 ‘기미독립선언서’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3.1운동 저변에 자리하고 있던 민족독립운동의 정신은 독립선언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에 항거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을 염원했던 국민들의 마음은 대한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서 등으로 표출됐다. 특히 이들 선언서는 같은 독립을 원하면서도 각각 특색을 담고 있었다.

1918년 음력 11월 만주·러시아를 비롯한 외국에 나가 있던 우리나라의 저명인사 39명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대한독립선언'. (출처:doopedia) ⓒ천지일보 2019.2.27
1918년 음력 11월 만주·러시아를 비롯한 외국에 나가 있던 우리나라의 저명인사 39명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대한독립선언'. (출처:doopedia) ⓒ천지일보 2019.2.27

◆우리 민족 최초 ‘대한독립선언서’

최초의 독립선언서는 대한독립선언서였다. 1918년 무오년에 선포돼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별칭한다. 11월에 선포됐으며 작성자는 조소앙(趙素昻)이다. 이 선언서의 특징은 한일병합의 무효를 선포하고, 우리 독립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게 할 것’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아울러 다른 선언서에 비해 무력을 허용하는 등 수위가 상당히 높다.

선언서의 대표자로는 해외에서 활동했던 저명한 인사가 거의 망라돼 있었다. 선언서를 작성한 지식인들은 먼저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임과 민주의 자립국임을 선포한다”며 “우리 대한은 타민족의 대한이 아닌 우리 민족의 대한이며, 우리 한토(韓土)는 완전한 한인의 한토이니, 우리 독립은 민족을 스스로 보호하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결코 사원(私怨)의 감정으로 보복하는 것이 아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일본의 병합 수단에 대해 사기 강박 무력폭행 등을 들어 ‘무효’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2000만 동포들에게는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해 육탄 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다.

이 독립선언서에는 김교헌 김동삼 조용은 신규식 정재관 여준 이범윤 박은식 박찬익 이시영 이상룡 윤세복 문창범 이동녕 신채호 허혁 이세영 유동열 이광 안정근 김좌진 김학만 이대위 손일민 최병학 박용만 임방 김규식 이승만 조욱 김약연 이종탁 이동휘 한흥 이탁 황상규 이봉우 박성태 안창호 등이 서명했다.

이 선언문대로 행했다면 대규모 유혈 전쟁을 피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1919년 2월 8일 동경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의 명의로 발표한 ‘2.8독립선언서'.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천지일보 2019.2.27
1919년 2월 8일 동경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의 명의로 발표한 ‘2.8독립선언서'.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천지일보 2019.2.27

◆학생들의 결사 각오 ‘2.8독립선언서’

이후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규식의 지시에 따라 조소앙이 동경에 파견돼 유학생들을 지도했다. 이듬해 2월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는 다른 결의 독립선언서가 선포됐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남녀학생들이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을 받아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했다. 식민지배지인 일본 본토에서 벌어진, 사실상 죽기를 각오한 위험천만한 선언이었다.

도쿄 조선청년독립단이 주동했고, 대표는 최팔용 윤창석 김도연 이종근 이광수 송계백 김철수 최근우 백관수 김상덕 서춘 등이었다. 당시 6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최팔용이 대표로 나가 이광수가 작성한 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한 후 만장일치로 가결해 일본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다가 일본경찰의 제지로 실패했다.

2.8독립선언서에서 청년들은 “조선 청년독립단은 우리 2000만 민족을 대표해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 앞에 독립됨을 선언하노라”고 단언했다.

이 선언서에서는 한일합방이 한국민의 뜻에 반하는 것인만큼 일본은 한국을 독립시킬 것,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국합병을 솔선 승인한 죄가 있으므로 속죄의 의무를 질 것,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우리 민족이 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해 독립을 달성할 것 등을 선언했다.
일본경찰은 주동자 60여 명을 체포했다. 이 중 9명에 대해서는 재판을 열고 출판법 위반을 걸어 최대 1년까지 금고형에 처했다.

이 2.8독립선언은 곧장 국내 민족지도자·학생들에게 알려져 3.1운동을 일으키는 한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1919년 3월 1일 3·1운동을 기하여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내외에 선언한 ‘기미독립선언서' (출처: 연합뉴스) ⓒ천지일보 2019.2.27
1919년 3월 1일 3·1운동을 기하여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내외에 선언한 ‘기미독립선언서' (출처: 연합뉴스) ⓒ천지일보 2019.2.27

◆종교적 염원도 담은 ‘기미독립선언서’

해외 지식인과 청년들의 선언으로 시작돼 실질적으로 국민들을 활활 타오르게 만든 선언서는 3.1독립선언서, 다른 이름으로는 기미독립선언서다. 이 선언서에는 앞선 두 선언서에서는 담기지 않은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표현이 담겼다. 육당 최남선이 초안을 작성했다.

선언서에서 종교인들은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권이 있는 국민인 것을 선언한다”며 “이것을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을 자손 만 대에 깨우쳐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라고 선언한다.

또 이를 가리켜 “하늘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므로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것을 막고 누르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종교인들은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온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누나! 새 봄이 온 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누나”라고 강조했다.

이 선언문의 문구를 개신교에서는 이사야서와 베드로후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인용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선언서 기초안을 작성한 육당 최남선 선생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를 지낸 고(故) 전택부(1915~2008) 선생은 최남선 선생과의 일화를 지난 2004년 8월 ‘성숙한 사회’에 기고한 글을 통해 소개한바 있다.

전 선생은 1956년 2월 병상에 누워 있던 육당을 위문 차 찾아가 “선생이 쓰신 3·1 독립선언서를 읽으면 어떤 기독교 사상가에 의해 쓰인 것이라고 느껴질 정도다”라고 물었고 돌아온 답변은 “내게서 기독교 사상을 빼면 아무것도 없지”라는 말이었다.

육당은 어릴 적부터 신구약 성서는 물론 외전까지 탐독한 것으로 전해진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 교회 뒷방에는 이준 이회영 안창호 등 애국지사들이 자주 모였다. 성경에는 ‘새 하늘 새 땅’이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구약에서 2번 신약에서 2번이다. 새 하늘 새 땅은 한 시대가 부패해 낡아지고 쇠해서 없어질 때 나타나게 되는, 신앙의 종착지로 묘사된다.

예수 승천 후 제자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는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라고 예언돼 있다. 예수의 12제자 중 수제자로 평가되는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 12~13절에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기록했다.

육당은 성경 예언의 내용이 우리나라에서 이뤄지길 염원하는 절절한 마음을 기미독립선언서에 담은 것으로 보인다. 독립선언서는 2만 1000매가 인쇄돼 전국에 배포됐다.

이처럼 민족의 독립을 넘어 신앙의 종착지까지 제시한 기미독립선언서는 전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를 바탕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3.1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날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이 서울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한용운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제창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지방에 있던 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등 4인은 참석하지 못했다. 천도교·개신교·불교·학생 측 외에도 각 지방의 만세운동에는 농민들이 가담했다. 각 도시의 상인들은 영업을 일시 중단하고 연합해 일제에 항거하는 등 사실상 전국민이 참여한 독립운동이었다. 민족적 궐기의 규모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집회횟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 3098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 5961명, 피검자수 4만 6948명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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