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기념비전 앞의 시위 군중(대판조일신문. 1919. 03. 03. 야마모토 특파원 촬영ⓒ천지일보 2019.2.17
1919년 3.1 독립만세 시위는 전국 단위로 지속적으로 진행된 평화적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사진은 광화문 기념비전 앞의 시위 군중. (대판조일신문. 1919. 03. 03. 야마모토 특파원 촬영) ⓒ천지일보 2019.2.17

1919년 2.8독립선언에 충격
천도교 중심으로 3.1절 기획
각국에 조선독립 본격 알려
해방 후 독립국가 인정근거

[천지일보=송태복 기자]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1919년 3월 1일 종로 탑골공원을 가득 메운 인파를 뚫고 한 남성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낭독자는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탑골공원에 온 34살의 만학도 정재용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은 탑골공원에 몰려든 인파를 보고 유혈사태를 우려해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긴 상태였다. 

정재용이 약속한 오후 2시가 지나도록 낭독하는 이가 없는 것을 보고 품안에 있던 독립선언문을 꺼내 낭독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군중 속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대한독립 만세!’
나지막한 소리는 곧 함성이 됐다. 자칫 해프닝으로 끝날 뻔했던 3.1 독립 만세 운동은 이처럼 일제의 군홧발에 짓밟힌 민중들의 한 맺힌 외침으로 시작됐다. 

◆ 대한제국 멸망의 발단 미-일 밀약

1905년 7월 29일 도쿄에선 일제의 대한제국 식민지화에 명분을 제공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이뤄졌다.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 총리와 윌리엄 태프트는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권을 갖는다’고 동의했다. 

밀약 100여일이 지난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았다. 미국은 늑약체결 후 가장 먼저 외교공관을 철수시켰다. 밀약의 당사자인 태프트가 미국의 27대 대통령, 가쓰라가 일본 총리(2기 내각)로 재임하던 1910년 조선은 결국 일본에 강제 병합되고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이후 식민지 경영의 통치 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한국 사회를 재편하기 위해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한민족은 무단통치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당했다. 

또한 회사령의 실시로 민족 자본가의 발전을 가로막고, 1910년부터 1918년 사이에 진행된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일본인들의 토지 수탈이 합법화되고 지주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그러던 중 1919년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했다는 소식과 함께 독살설이 나돌자 민중들의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다. 

◆ 윌슨 민족자결주의2.8 독립선언 

3.1운동이 일어난 배경에는 열강의 변화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1918년 1월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4개조의 전후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이는 식민지 약소민족을 크게 고무시켰다.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선 ‘열강이 약소국인 조선을 도울 것’이라는 희망적 분위기가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1919년 2월 1일에 만주와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39명이 중국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후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규식의 지시에 따라 조소앙이 동경에 파견돼 유학생들을 지도했다. 그 결과 3.1운동이 일어나기 20여일 전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의 간다(神田)에서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식민지시대 피지배국 민중들이 지배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을 감행하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2.8독립선언은 조국의 지도자들에게 충격과 자극을 줘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여기에 고종황제의 독살설까지 퍼지자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때마침 진행한다는 만세시위에 온 국민의 관심은 컸다. 

국내 독립운동은 종교계가 앞장서 평화적 시위로 기획됐다. 손병희 선생을 중심으로 천도교가 주축이 됐다. 손병희·최린 등 천도교계, 이승훈 등 기독교계, 한용운 등 불교계가 독립 선언을 계획했다. 육당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고 알려졌지만 역사학자들은 민족대표들이 도래할 세상에 대해 염원한 것을 조합해 문장가였던 최남선이 정리한 것으로 보고 있다. 

2월 27일 독립선언서가 인쇄돼 종교 교단을 중심으로 미리 배포됐다. 그 후 고종의 장례일인 3월 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전국적인 민족 해방 운동이 전개됐다. 

재일본한국YMCA-2,8독립선언 가담 독립운동가들 출옥 기념 사진 (출처: 재일본한국YMCA 사진 캡처) ⓒ천지일보 2019.2.17
재일본한국YMCA-2,8독립선언 가담 독립운동가들 출옥 기념 사진 (출처: 재일본한국YMCA 사진 캡처) ⓒ천지일보 2019.2.17

◆ 일제의 무단통치를 문화정책으로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무단 통치를 하던 조선총독부는 문화 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3·1 운동에 의해 일본 정부나 총독부 측에서는 기존의 통치 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군인인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파견을 기점으로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 결과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가됐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 교육이 확대됐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한 것으로, 친일파 양성을 통해 한민족의 분열을 시도했다. 이는 식민 통치를 철저히 은폐하기 위한 통치 방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 증거로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축출될 때까지 문관 총독은 단 한명도 임명되지 않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꿨지만 사실상 명칭만 변경된 것으로 경찰력은 오히려 더욱 강화됐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위한 전문적인 ‘고등 경찰제’를 도입했다. 

일본은 문화 통치를 통해 자신들을 조선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소수의 친일관료들을 키워 조선인을 이간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 의식 성장을 오도하며, 초급 학문과 기술 교육만을 이용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대량 양성했다. 

1942년 10월 25일 사진에 담긴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34회 의정원 의원 일동 모습  (제공:천안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18.5.7
1942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34회 의정원 의원 일동 모습. 1919년 3.1 운동은 독립운동에 대한 공감과 자신감으로 확산됐고 상해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다양하게 전개된 독립운동은 전 세계에 일제의 국권 수탈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2차 대전 승전국은 이런 활동을 인정해 대한민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제공:천안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18.5.7

◆ 독립운동 도화선‧임시정부 수립으로

뉴욕타임즈는 1919년 3월 13일자에서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운동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여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기록했다. AP통신은 “독립선언문에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000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고 명시돼 있다”고 보도했다.

3.1운동으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독립을 향한 마음이 서로 일치함을 확인했다. 이는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감과 필요성으로 확산됐다. 민족 해방 의지를 바탕으로 국외에서의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 국내에서의 비밀결사 운동, 교육 문화 운동 및 생존권 수호 투쟁 등을 통해 운동 역량이 강화돼 갔다. 만주지방에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3.1운동으로 인해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민주 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배경이 됐다. 

이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고, 러시아레닌에게 조선의 상황을 알려 독립운동 지원 약속을 받아 내는 등 3.1운동은 각국에 한국의 독립의지를 전파하는 계기가 됐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2차 대전 승전국은 이런 한국의 뜻을 받아들여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 중국5.4운동, 간디 평화운동에 영향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에 참여한 일부 지식인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부 사학계에서는 3.1 운동이 인도 간디의 비폭력 반영운동, 그 밖에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보고 있다. 3.1운동은 정부의 부패와 비리 권력에 항거한 4.19, 5.18, 6.10 항쟁 등 민주 항쟁의 정신적 근간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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