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792년(정조 16) 4월 정약용(丁若鏞)의 부친 정재원(丁載遠)이 진주목사로 재임 중에 임소(任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사암(俟菴)은 형제들과 함께 5월에 관을 모시고 와 충주 하담 선영에 장사지내고 마현의 가묘(家廟)에 혼백(魂魄)을 모셨다.

정조는 사암이 부친상으로 3년 시묘생활(侍墓生活)을 하는 과정에서 자주 안부를 물어 보면서 사암에 대한 각별한 신임을 보여 주었는데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해당 내용을 인용한다.

그런데 이 해 겨울에 수원에 성을 쌓는데 임금이 말씀하시기기를“기유년(1789년) 겨울에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놓을 때 약용이 그 방법을 아뢰어 주어 일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그에게 명해 집에 있으면서 성을 쌓는 방법을 조목별로 올려 바치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윤경(尹耕)의 보약(堡約)과 류성룡(柳成龍)의 성설(城說)에서 도움을 받아 그중에서 좋은 방법을 따다가 초루(譙樓), 적대(敵臺), 현안(懸眼), 오성지(五星池)의 여러 방법을 이치에 맞게 밝혀 임금께 올렸다.

임금은 또 내각에 있는 도서집성(圖書(集成)과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보내 무서운 물건을 끌어 올리고 세우는 인중기중(引重起重)의 방법을 강론하도록 하셨기에 내가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리고 활차(滑車)와 고륜(鼓輪) 등을 써서 작은 힘으로 크고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수 있게 했다.

성 쌓는 일을 끝마쳤을 때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다행히 기중가(起重架)를 사용해 4만냥의 비용을 절약했다”고 하셨다.

위와 같은 내용을 통해 부친상으로 3년간의 시묘생활을 하는 사암에게 정조가 화성(華城)의 건축과 관련된 일을 지시하고 더불어 내각에 있는 도서집성과 기기도설을 내려 보낸 모습을 보면서 당시 사암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어느 정도로 각별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1794년(정조 18) 7월에 사암은 시묘생활을 마치고 다시 조정으로 복귀해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제수됐으며, 8월에는 비변사의 낭관(郎官)을 맡고 10월에 다시 홍문관으로 들어가 교리(校理), 수찬(修撰)이 됐다.

같은 해에 정조의 어명으로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적성(積城), 마전(麻田), 연천(漣川), 삭녕(朔寧) 지역에 파견됐으나 그 이듬해에 발생한 을묘박해(乙卯迫害)에 연루돼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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