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780년(정조 4) 봄에 정재원(丁載遠)이 화순 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예천군수로 옮겼는데 당시 서울에 있던 사암(俟菴)은 다시 예천으로 내려와 부친을 봉양하면서 반학정(伴鶴亭)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그 해가 가기 전에 정재원이 암행어사(暗行御史)의 탄핵으로 예천군수에서 물러나 마재로 귀향했다.

1782년(정조 6) 정약용(丁若鏞)은 정약전(丁若銓)과 함께 봉은사(奉恩寺)에 보름동안 머물면서 경의과의 과목을 공부했으며, 그 이듬해인 1783년(정조 7) 2월 순조의 왕세자 책봉을 경축하기 위한 증광감시에서 정약전과 함께 경의초시에 합격했으며, 이어서 4월에 실시한 회시에 생원으로 합격한 이후 창덕궁 선정전에서 정조와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지게 됐다.

이러한 만남에서 정조는 다산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을 때 사암은 임오생(壬午生)이라 답변했다고 하는데 바로 임오생이라 함은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가 참변을 당한 그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있었던 해이기에 사암의 이러한 답변은 정조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사암은 생원으로서 대과를 준비하기 위해 동년(同年) 4월에 성균관에 들어가서 태학생(太學生)의 신분이 됐는데 특히 이듬해인 1784년(정조 8)에 정조가 모든 태학생들에게 중용에서 의문나는 70개 항목을 선정해 여기에 대한 답변을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돈으로서 평소 학문이 뛰어났던 이벽(李檗)에게 도움을 부탁했는데 당시 수표교에 거주하고 있던 광암(鑛菴)은 사암보다 8세 연상이라 할 수 있는데 사암이 광암과 공동으로 연구해 과제를 제출했으며, 정조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1789년(정조 13) 대과에서 급제한 이후 희릉직장(禧陵直長)에 제수되면서 첫 관직생활이 시작됐으며, 대신들의 품의로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되어 규장각(奎章閣)에서 월과(月課)에 답변을 올리게 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관직생활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노론의 탄핵을 받아서 해미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10일만에 해배(解配)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니 이는 앞으로의 상황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암시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다시 지평(持平)으로 제수됐다가 1792년(정조 16) 사암의 선대와 깊은 인연이 있는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으로 옮겼는데 특히 홍문관은 사암의 선조들 중에서 8대가 연속적으로 재임한 곳이어서 그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