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정재원(丁載遠)의 부실(副室) 서모김씨(庶母金氏)는 향년(享年) 60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사암을 볼 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하며, 이러한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사암도 서모김씨의 별세(別世)를 슬프게 생각했을 것이다.

한 인물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스승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렇다면 어린 시절부터 천부적인 두각을 나타냈던 사암(俟菴)의 스승이 누구이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사암은 불과 4세라는 어린 연령에 부친으로부터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0세부터 부친이 관직을 역임하지 않았던 5년동안 경전(經典)을 비롯해 사서(史書)와 고문(古文)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사암(俟菴)의 중형(仲兄) 손암(巽庵)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수제자(首弟子)였던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門下)에서 배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사암은 부친 이외에 스승이 없었던 것일까?

이 문제와 관련된 단서를 풀 수 있는 인물이 있으니 사암 못지 않게 천재로 널리 알려졌던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의 종조부(從祖父) 이익(李瀷)이다.

이익은 지봉(芝峯) 이수광(李晬光)과 반계(磻溪) 류형원(柳馨遠)과 함께 실학(實學)의 선구자(先驅者)로 알려진 인물이다.

본관(本貫)은 여주(驪州)로서 부친 이하진(李夏鎭)이 평북 벽동에서 유배중이었던 1681년(숙종 7) 출생했는데 공교롭게도 부친이 세상을 떠나기 전해인 1680년(숙종 6) 출생하였다는 것이니 이는 사암이 9세에 모친이 세상을 떠날 때 보다 더 어린 연령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겪었다.

그런데 성호(星湖)는 평생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후진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을 비롯해 기라성(綺羅星)같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성호는 2세라는 어린 연령에 부친이 세상을 떠난 이후 중형(仲兄), 섬계(剡溪), 이잠(李潛)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섬계가 1706년(숙종 32) 노론 김춘택(金春澤)과 이이명(李頤命)이 당시 왕세자(王世子)를 위해하려 한다는 상소를 올려 일대 파문을 일으켜 숙종의 친국(親鞫)까지 받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장살(杖殺)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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