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이익(李瀷)은 이잠(李潛)의 죽음을 보면서 근본적으로 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평생 관직생활을 하지 않기로 하였으며, 그 이후 초야에 은거하면서 성호사설(星湖僿設)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필자가 성호(星湖)의 생애를 간략하게 나마 소개한 배경은 사암(俟菴)이 당시 시대적인 정황으로 볼 때 권철신(權哲身)같이 성호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한 것은 아니지만 이가환(李家煥)을 통해 성호의 유고(遺稿)를 읽은 것이 강력한 동기부여가 돼 성호를 사숙(私淑)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숙이란 어떤 인물에게 직접 가르침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그 인물이 남긴 생전의 글을 공부하면서 그 가르침을 흠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암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성호를 사숙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5세에 결혼을 하자 마침 아버지께서 다시 벼슬을 해 호조좌랑이 되셨으므로 서울에서 셋집을 내어 살게 됐다. 이때 서울에는 이가환(李家煥)공이 문학으로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형인 이승훈(李承薰)도 또한 몸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쓰고 있었는데 모두가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고 있었다. 약용(若鏞)도 성호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얻어 읽고 혼연히 학문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덧붙이면 사암은 성호의 종손(從孫)인 금대로부터 성호가 생전에 남겼던 유고(遺稿)를 전달받고 읽는 과정에서 그 사상(思想)을 깊이 흠모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 평생 성호를 사숙하기에 이르렀다.

영조에 이어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22대 임금으로 즉위한 1776년(영조 52) 사암은 동갑(同甲)이 되는 홍화보(洪和輔)의 딸과 혼인했는데 사암의 장인이 되는 홍화보의 본관(本貫)은 풍산(豊山)으로 본래 무과출신으로서 장연부사와 무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승지를 역임하였던 인물이었다.

특히 홍화보는 병법에 조예가 깊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훗날 사암이 아방비어고(我邦備禦考)를 저술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1777년(정조 1) 정재원(丁載遠)이 화순현감으로 부임하게 돼 사암이 따라 가게 됐으며, 1778년(정조 2) 동림사(東林寺)에서 정약전(丁若銓)과 함께 공부했는데 이 절은 화순현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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