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795년(정조 19) 7월 을묘박해에 연루돼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된 정약용(丁若鏞)이었지만 현지(現地)에서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사암(俟菴)은 금정찰방으로 재임하면서 오래전, 부친 정재원(丁載遠)을 따라 다니면서 직접 목격하였던 농민들의 모습과 더불어 암행어사 시절 몸소 체험했던 농민들의 아픔을 다시 한 번 뒤돌아 볼 수 있는 계기라 생각하면서 농민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아울러 역속(驛屬)들이 대부분 천주교를 믿고 있어서 정조의 뜻에 따라 조정(朝廷)의 금령(禁令)을 전하며 제사를 지내도록 권고했다.

한편 사암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종손(從孫)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에게 편지를 보내어 성호의 사상과 문집을 정리하는 강학회(講學會)를 열자는 제안을 했다.

목재는 사암의 제안을 수락하여 강학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으며, 사암이 1795년(정조 19) 10월 26일 온양의 봉곡사(鳳谷寺)에 가장 먼저 도착하고 이튿날 목재가 도착한 이후 당시 내포 지방의 남인학자들이 이러한 소식을 알게 돼 목재의 동생인 이명환(李鳴煥)을 비롯해 11명이 참석했으니 강학회의 참석인원은 전부(全部) 13명에 이르렀다.

강학회는 11월 5일까지 10여일 동안 계속됐는데 낮에는 성호의 유고(遺稿)를 정리하고 밤에는 학문에 대해 강론했는데 목재가 좌장(座長)으로서 질문하면 다른 선비들이 답하고 다른 선비가 모르는 것을 물으면 목재가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또한 성호의 많은 저서중에서 가례질서(家禮疾書)를 표준으로 삼아 목재가 교정을 보고 다른 선비들이 이를 필사했다.

이어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설을 더욱 깊이 연구하여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지었는데 이는 퇴계집(退溪集)의 일부를 읽고 느낀 바를 33항목의 글로 완성한 것이다.

여기서 도산사숙록의 서문 일부를 인용한다.

[ 을묘년(1795년) 겨울에 나는 금정에 있었다. 마침 이웃 사람을 통해 퇴계집 반부(半部)를 얻었다.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마친 뒤,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 한 편을 읽고 나서야 아전들의 아침인사를 받았다. 공무를 마친 낮에는 그 의미를 부연해서 설명한 뜻을 한 조목씩 수록하여 스스로 깨치고 살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서 도산사숙록 이라고 이름했다. ]

이상과 같이 사암이 금정찰방으로 재임중에 있었던 행적을 정리하였는데 사암은 금정찰방으로서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평소 흠모하던 퇴계의 문집을 읽고 느낀 바를 쓴 도산사숙록을 완성하고 성호의 정신을 계승하는 강학회에 참석함으로써 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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