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유종지미(有終之美)
[고전 속 정치이야기] 유종지미(有終之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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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61세를 넘긴 한무제 유철은 심신이 피폐해졌다. 더구나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욕심 때문에 수많은 사기꾼들이 등장했다. 무제는 낮잠을 자다가 비몽사몽간에 몽둥이를 든 나무인형 수 천개를 보았다. 강충은 태자 유거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기회를 보아 무제에게 말했다.

“황상의 병은 무당의 저주 때문입니다. 요즈음 누군가 궁중에 나무인형을 땅에 묻고 저주하여 독기가 가득합니다.”

무제는 강충에게 사실을 조사하라고 명했다. 강충은 심복 무당을 데리고 궁중을 돌아다니며 사방에 땅을 파서 증거를 잡는다고 소란을 떨었다. 수백명이 연좌돼 피살됐다. 강충의 공격대상은 태자 유거였다. 그는 태자의 모친 위(衛)황후와 태자의 궁실을 뒤지다가 미리 소매 속에 감추었던 인형을 꺼내 흔들며 소리쳤다.

“태자궁에서 발견된 나무인형이 제일 많다. 또 비단에 쓴 황상을 저주하는 주문도 많다.”

소부 석덕은 변명할 방법이 없으니 먼저 강충을 잡자고 건의했지만 태자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무제를 직접 만나 해명하려고 했지만 강충의 심복들이 가로막았다. 결국 태자는 무사들을 이끌고 가서 강충을 참수했다. 무제는 승상 유굴리에게 태자를 체포하라고 명했다. 시가전이 5일 동안 계속됐다. 장안성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태자 유거는 장안성을 탈출해 민가에 숨었다가 자살했다. 유거의 생모 위황후는 아들이 죽기 전에 이미 폐출됐다가 자살했다. 위씨 일가를 비롯한 수만명이 이 사건에 연루돼 피살됐다. 

이 유혈극은 궁정 내부에서 황제의 자리를 놓고 벌어진 정치투쟁이었다. 태자 유거의 외가인 위씨는 조정에서 상당한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유거의 외삼촌인 대장군 위청은 장평후, 표기장 곽거병은 위황후의 언니가 낳은 아들로 관군후로 봉해졌다. 그들의 정치적 배경이던 위황후는 절세미인으로 오랫동안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유거는 7세에 황태자로 책립됐다. 무제의 뜻을 거슬렀다는 의미인 ‘여(戾)태자’라고 부른 것은 조작된 모반사건에 말려 죽은 후였다.

무제는 출정할 때마다 태자 유거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궁정의 일은 위황후에게 일임했다. 곽거병과 위청이 잇달아 죽자 위씨 세력은 크게 약화됐다. 아름답던 위황후도 나이가 들자 예전처럼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게 됐다. 무제는 만년에 두 손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구익(鉤弋)부인 조첩여를 총애했다. 그녀가 황자 유불릉을 낳았다. 무제는 황태자를 유불릉으로 바꾸고 싶었다. 강충은 이러한 무제의 속내에 호응해 사건을 조작했다. 

이 사건으로 무제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거듭된 원정의 실패와 국내정세의 불안, 가정의 참변을 겪은 무제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BC 89년, 그는 모든 방사들을 추방하고 다시는 미신을 믿지 않았다. 또한 조칙을 내려 서역의 윤대(輪臺)에 주둔하던 군대를 해산하고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는 일도 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윤대의 조’라고 하는 이 조칙에는 임의로 조세를 거두지 말 것과 국방도 수비를 위해 준비만 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BC 87년 2월,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한 무제는 유불릉을 태자로 책립하고, 곽광(霍光), 김일제(金日磾), 상관걸(上官傑)을 보정으로 임명했다. 무제는 유불릉의 생모인 구익부인을 죽여 태후가 정치에 참여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했다. 무제는 54년 동안 황제로 있었으며 70세에 죽었다. 중국사에서 보기 드문 장수를 누린 황제였다. 진시황, 당태종, 강희제와 함께 중국의 4대 황제에 속한 그의 위대함은 마무리를 잘한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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