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공맹소고(孔孟小考)
[고전 속 정치이야기] 공맹소고(孔孟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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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훗날 2018년의 봄을 생각하면, 다른 어느 해보다 특별했던 봄으로 기억할 것 같습니다. 지난 4월 초, 친구들과 함께 중국 산동성에서 봄을 맞이했습니다. 여행은 걸어서 하는 독서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고 합니다. 또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인가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번 여행에 ‘산시춘유회(山詩春游會)’라는 타이틀을 붙였습니다. 산동과 시를 즐기는 봄나들이라는 뜻입니다. 산시춘유회는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 가운데 대부분을 낳은 산동을 찾는다는 의미와 함께 평생의 지기들끼리 함께 하는 귀중한 기회였습니다. 산동은 중국대륙에서 바라보면 발해만으로 불쑥 내민 변경에 해당합니다. 이런 공간적 특성은 그 지역 주민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산동 사람들은 중앙에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변경, 즉 경계선상’에 대한 의식이 높은 편입니다. ‘변경’이라는 공간은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기 쉬운 곳이며, 변화의 가능성이 그만큼 높은 곳을 의미합니다.

산동성은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으로 우리와 가까웠습니다. 고대 제자백가가 꽃을 피워 중국문화의 원형을 만든 곳이기도 합니다. 산동인들은 변경인이었으므로 중앙이 생각하지 못하는 과감한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관중은 제환공을 도와 중국 최강의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이후에도 산동은 각종 저항의 중심이자,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정치적 변화가 있을 때는 산동을 차지하는 쪽이 승자가 됐습니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북방에서 가장 적극적인 개혁조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국교를 회복한 이후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됐습니다. 인천공항에서 산동성의 관문인 칭다오 공항까지는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립니다.

유명한 도교성지 라오산에서 하루를 지내고 다음날 공자를 찾아 곡부로 향했습니다. 도중에 문득 맹자의 고향 추성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대장부론으로 청춘을 뜨겁게 달구었던 그가 그리웠습니다. 맹자의 생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곳을 배회하다가 간신히 찾은 생가는 너무 초라했습니다. 한 벗은 Vice의 실체라고 쓴웃음 지었습니다. 간신히 찾은 맹자묘에서는 마침 한식을 맞아 맹씨후손들의 봉토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우리도 삽을 들고 동참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진심으로 반겼습니다. 일부러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서 흙을 거머쥐고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양혜왕에게 왜 어떻게 해야 옳은지 묻지 않고 어떻게 해야 유리한지 묻느냐고 일갈했던 맹자가 오늘의 세태를 보면 무슨 말을 할까요? 중국은 오로지 부국강병에 매진하며 대국으로서의 진면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다음날 찾은 공자의 성지는 웅장했습니다. 일반인은 물론 수많은 학생들이 깃발을 들고 참배하고 있었습니다. 고색창연한 건물군과 수많은 유적들, 역대 왕조의 여러 황제들까지 찾아와 남긴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늘도 있습니다. 한때 실각했던 모택동이 정치적 부활을 위해 문화대혁명이라는 기치를 들고 공자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혁명이 아니라 ‘문화대파괴운동’이었습니다. 철부지 홍위병들은 공자의 유적지를 비롯한 전통문화 유적을 무자비하게 파괴했습니다.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우리가 방문했을 때까지도 복구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집권자는 집권하기 전과 후가 다릅니다. 전통문화를 격렬하게 공격하면서 집권한 후, 자신감을 회복하면 곧바로 전통문화숭배로 방향을 전환합니다. 가장 상징적인 것이 공자에 대한 대우입니다. 미국과 G2를 이룬다고 자부하는 지금 공자부활운동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중국이 패권주의로 들어선다는 신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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