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농경사회가 외부사회와 충돌하면서 시경에서는 반전의식과 상무의식을 형성했다. 고대 그리스인과 유목민족은 전쟁을 통한 약탈에 강력한 유혹을 느꼈다. 그러나 농경사회는 땅에서 행복과 희망을 얻으며 약탈에 대한 유혹을 떨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상무에도 절제가 있었고, 전쟁에 대한 심미에도 절제가 있었다. 전쟁은 가족과 국가를 지키는 범위로 한정됐다. 시경에는 전쟁으로 인한 짙은 슬픔과 애잔함이 넘친다. 호머의 일리아드는 전쟁을 생존수단으로 인식하고 재난과 고통을 비장함으로 승화시켜 전쟁에 대한 정신적 동력을 제공했다. 시경에서 중국인들은 전쟁을 생존에 대한 부담으로 받아들여 원대함보다는 올바름에 대한 반응을 선택했다. 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재난은 시경을 통해 강렬한 슬픔과 애잔함을 길러주었다. 이러한 정서는 전쟁을 싫어하는 사회적 정신의 요인으로 발전했다. 

전쟁을 소재로 한 예술을 다루는 방법에서 시경은 ‘전쟁을 통해 전쟁을 부정하는’ 특색을 갖추게 됐다. 호머의 서사시에서는 전쟁을 표현하기 위해 참혹한 전쟁터의 장면을 조금도 꺼리지 않고 그대로 묘사해 전쟁을 긍정적으로 만들었다. 시경의 상당한 부분은 전쟁에서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부모를 걱정하거나, 연정과 불행한 결혼을 표현했다. 전쟁이 멀어질수록 흐릿한 배경을 바탕으로 담담해지는 정서가 나타난다. 호머의 서사시는 전쟁에서 비장함, 격정, 희망, 힘, 숭고함, 위대함과 같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강렬한 암시를 드러내며 전쟁이 이러한 모든 것들을 창조한다고 노래한다. 반면에 시경은 전쟁에서 걱정, 처량함, 유약함, 절망, 눈물, 절망을 발견하고 전쟁이 모든 불행의 원천이라고 노래한다.

일리아드와 시경의 시대에 정착된 동서양 전쟁문화의 특성은 각자의 역사적 시공간으로 이어지면서 약 2천년 동안 숙성기간을 지나 결국 19세기에 아시아에서 예상하지 못한 충돌을 일으켰다. 마르크스는 아편무역사에서 아편전쟁에 반영된 동서양의 충돌에는 두 가지의 오랜 문화적 성질이 포함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반야만인이었던 중국인은 도덕적 원칙을 유지하면서 문명인인 유럽인들의 경제원칙에 저항했다. 이 대결에서 부패한 세계의 대표는 도덕적 원칙을 기반으로 삼았으며, 가장 현대적 사회의 대표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천박한 것을 귀중한 것으로 포장해 판매했다. 이는 참혹한 비극이었다. 영국과 스페인은 신대륙과 동양에서 전쟁을 펼쳤으며,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는 시칠리에서 전쟁을 펼쳤고,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으며, 고대 그리스의 아케아인은 토로이를 원정했다. 그 가운데 모종의 문화가 내부를 관통했다.

중국민족은 강융(羌戎), 귀방(鬼方), 험윤(玁狁)과 대항했으며, 한과 당에 이르러서는 흉노, 돌궐과 부딪쳤고, 다시 송과 명에 이르러서는 몽고, 여진과 전쟁을 펼쳤다. 역시 여기에서 모종의 문화가 내부를 관통했다. 두 문화의 내부에는 일리아드와 시경으로부터 시작된 차이가 이어졌다. 근현대의 침입자는 북방의 대초원에서 거대한 바다로 바뀌었지만, 중국민족은 수천년 동안 전쟁문화의 추세를 결정한 전통적 전쟁관념과 전쟁행위로 근대의 해상침입에 대응했을 뿐이다. 근대 서양의 해양국가는 세계를 무대로 세력을 확장했다. 문화전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공업혁명을 이룩한 신기술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서양 전쟁문화의 오래된 주제였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19세기 동서양의 전쟁문화가 충돌한 것은 멀리 일리아드와 시경의 시대에 이미 확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원형은 2권의 고전문헌 속에서 차이점을 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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