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역사의 사명은 과거의 총결이다. 지난 재난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객관적 반성이 필요하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미래로 가는 갈림길에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인류는 역사 덕분에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었다. 전쟁문화연구는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해석할 수 있을 뿐더러 역사학의 사명 가운데 일부를 분담할 수도 있다. 군사학의 연구가 장래의 전쟁에 대한 준비에 더 치중한다면, 전쟁문화연구는 군사학뿐만 아니라 인류의 항구적 평화라는 문제에 더 치중한다. 전쟁을 깊이 연구하지 않고서는 항구적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를 함께 다룰 때,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중하다. 풀러(Fuller)는 전쟁은 거대한 바다가 일으키는 밀물과 썰물처럼 일정한 규율에 따라 생멸한다고 했다. 천재적인 비유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를 절망에 빠뜨린다. 전쟁은 인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전쟁은 가능성과 현실성 사이에서 밸브를 잠글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평화는 전쟁의 밸브를 잠시 잠근 상태이며, 전쟁 가능성은 이 밸브를 잠시 억누르고 있는 상태일 뿐이다. 전쟁의 밸브는 각종 규칙과 불규칙, 예측 가능성과 불가능성, 통제와 통제 불능이 공존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각종 사회 요인으로 인하여 수시로 닫혔다가 열린다.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한 시대의 전쟁을 통제하는 밸브가 얼마나 허약한지 알 수 있다. 칸트의 영원한 인류 평화는 신기루처럼 환상에 불과하다. 

서양 학자는 현재 인류의 영원한 평화라는 희망이 지구 전체에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정부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칸트가 말한 자유국가연맹적 세계정부의 강림을 방불케 한다. 영원한 평화라는 천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관점은 우리의 역사적 지식에 대한 표피적 이해와 역사관찰에 대한 얄팍한 이해를 반영한다. 그들은 서양이라는 유한한 공간에 대한 연구를 통해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유한한 경험을 기초로 해서는 세계의 미래를 그릴 수 없다. 동양으로 눈을 돌려보자, 세계정부가 중국의 황하유역에서 실현된 적이 있다. 하, 은, 주 삼대는 모두 약 400년 이상 지속됐다. 이 시대에 사람들은 태평성세를 누렸다. 당시 사람들은 영원한 평화를 위한 사회적 기제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내전을 피할 수는 없었다. 동양사상 세계정부는 전쟁과 평화라는 주기적 순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떤 근거로 세계정부 수립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전쟁은 삶의 균형추인 지혜가 일그러진 현상으로, 인류의 총명함과 우둔함의 복합체이다. 전쟁은 양날의 칼과 같다. 인류의 창조력과 상상력을 격발시켜 잠재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 결과 나침반에서 화약, 원자력, 컴퓨터, 녹음기, 무선통신이 발달했다. 전쟁이 자극하지 않은 것이 없다. 장래의 인류는 컴퓨터가 전쟁을 대신하는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전쟁에서 컴퓨터로 대포를 작동하려던 욕망 덕분에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었다. 호전주의자는 전쟁이 문명의 발전과 인류의 고상한 정신을 함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야스퍼스의 말처럼 전쟁은 인류의 우둔함을 증명할 뿐이다. 핵무기는 가장 빠른 속도로 역사적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자살도구에 불과하다. 핵무기는 우리의 역사를 조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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