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곳간] “암행어사 출두요~” 외침, 실제론 어려웠다
[문화곳간] “암행어사 출두요~” 외침, 실제론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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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곳간, 암행어사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3
문화곳간, 암행어사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3

 

임금의 눈 역할… 첩보작전 방불케해
굶어죽거나 자객의 습격 받기도
임무 담긴 봉투는 4대문 밖에서 확인


마패 외에도 다목적 자 ‘유척’ 지녀
비리 예방·적발하고 조세부담 감찰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도성 밖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열어 보거라.”

임금에게 받은 봉투 한 장을 손에 쥔 남성. 부랴부랴 짐을 싸서 등에 걸쳐 매고 도성 밖으로 나갔다. 임금의 명령대로 도성 밖 조용한 곳에 봉투를 여는데, 봉투 안 종이에는 글자가 적혀있다. 그의 사명이었다. 임금의 눈을 갖고 세상에 나간 그는 ‘암행어사’였다.

오늘날에도 ‘드루킹’ ‘갑질논란’ 등 여러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담당자가 정해지면, 하나둘씩 감춰진 사실은 파헤쳐진다. 상황은 다르겠지만 조선시대에도 여러 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중요한 사건의 경우 임금이 직접 나서기도 했는데, 이때 임금을 대신해 암행어사가 세상에 파견됐다.

◆적임자 몰래 불러 사명 줘

암행어사 파견은 마치 첩보 작전과 같았다. 임금이 암행어사를 보내려면 의정부에 지시해 적임자를 선발하도록 했고, 의정부에서는 당하관(정3품 통훈대부 이하)으로서 젊고 성격이 곧으며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3배수로 추천했는데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리가 선발되는 경우가 많았다. 임금이 이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적임자를 선발하고 나면 임금은 당사자를 직접 불러 통보했다. 그래서 영의정도 누가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암행어사는 보통 본인이 수행해야 할 임무가 적힌 봉투를 갖고 떠났다. 이 봉투는 4대문 밖으로 나간 뒤 혼자 있을 때 몰래 열어봐야 했다. 만약 4대문 밖으로 나가기 전에 봉투를 뜯어본다든지, 자기 집에 들르면 처벌을 받았다.

◆암행어사의 증표 ‘마패·유척’

암행어사는 옷을 변장하고 다녀야 했고, 역졸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상징하는 ‘마패’와 ‘유척’을 가지고 떠났다. 마패는 암행어사 신분을 증명해 주는 신분증 역할을 했다. 유척도 암행어사의 필수품이었다.

유척은 약 20㎝ 내외의 길이를 가진 크지 않은 놋쇠로 만든 ‘자’다. 유척은 조선을 대표하는 다섯 개의 척도가 모두 들어있었다. 악기제조에 쓰인 ‘황종척’과 곡식을 잴 때 쓰인 ‘영조척’, 포목의 길이를 재는데 쓰인 ‘포백척’, 제사 관련 물품을 제작할 때 쓰인 ‘예기척’과 토지 길이를 잴 때 쓰인 ‘주척’이 이에 속했다. 즉, 조선시대에서 측정이 필요한 모든 일과 장소에는 유척이 반드시 필요했다.

비리를 예방하고 적발하기 위해 암행어사는 국가 공인 자인 유척을 사용해 도량형 기구가 제대로 만들어지고 있는지, 지방수령 등에 의한 자의적인 세금징수가 아닌 정확한 조세부담이 잘 이뤄지는 지를 감찰했다.

보통 ‘암행어사 출두요’라고 외치며 관군들이 관아로 몰려 들어가는 모습이 생각날 것이다. 하지만 암행어사는 업무 과정이 매우 어렵고 특히 위험한 직업이었다. 아사하는 것은 물론 자객의 습격을 받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다산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는 암행어사 시절 봉고 파직한 관리들의 미움을 사 훗날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실록 속 암행어사

조선왕조실록에는 암행어사에 대한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다. 1392년(태조 1) 의주 등 국경지역의 불법적인 월강무역(越江貿易)을 금지시키기 위해 조선시대 최초로 행대어사(암행어사 제도가 확립되기 전 지방에 파견돼 지방관을 살피고 범죄 사건을 조사하던 사헌부 감찰)를 보냈다. 이들의 주요임무는 지방 세력의 불법탐학을 살피고 바로 잡는 것이었다.

암행어사라는 말이 실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중종 4년(1509) 11월 정묘조에 부원군 김수동이 “근일 암행어사를 분견해 수령의 범죄를 적발하는 것은 편치 못한 일이오”라고 한 발언 속에 담겨 있다. 이는 중종이 당시 암행어사를 비밀리에 많이 파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암행어사 파견에 대해서는 반대의견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역대의 왕들은 이를 계속 시행했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왕조정치가 점점 쇠미해지자 더욱 빈번히 파견됐고, 제도적으로도 정비되고 발전됐다.

그러다 고종 29년(1892) 이면상이 전라도 암행어사로 임명된 것을 마지막으로 폐지되면서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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