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곳간] 조선시대 외국어공부는 ‘회화’ 위주였죠
[문화곳간] 조선시대 외국어공부는 ‘회화’ 위주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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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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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민이 외국어 가르치던 ‘사역원’
내부서 우리말 쓰면 최대 파면까지
4개국어 배워… 제1외국어 ‘중국어’
외국어로 매매 모습 담은 교재 이용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오늘날은 지구촌 어디를 가던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과 교류할 수 있다. 서점에는 영어뿐 아니라 중국어·일어 등 각국 언어를 공부할 수 있는 서적이 많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외국어를 가까이 할 수 있는 시대인 것 이다.

그런가 하면 사극이나 역사 속에는 우리 선조들이 주변국과 외교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당시에도 외교는 매우 중시됐는데, 선조들은 어떻게 외국어 공부를 했던 걸까.

◆조선, 외국과의 관계 중시

시대적으로 조선은 개국 초부터 대외정책의 근간이 ‘사대교린(事大交隣)’이었다. 중국에 대해서는 ‘사대’, 다른 국가에 대해서는 ‘교린’을 근간으로 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외교관계에서 의사소통은 중요했다. 당시에는 의사적 소통을 ‘역관(譯官)’이 맡았다. 오늘날로 치자면 외교관이나 통역사다. 당시 역관은 외국어의 번역과 통역은 물론, 교육을 맡은 사역원(司譯院) 관리까지 맡았다.

사역원에서는 4대 외국어인 중국어·몽골어·만주어·일본어를 공식적으로 가르쳤다. 이 중 제1외국어는 중국어였다. 대표적인 중국어 회화 학습서는 ‘노걸대(老乞大)’와 ‘박통사(朴通事)’가 있었다. 노걸대의 내용은 고려의 상인이 특산물을 싣고 중국 북경에 가서 이를 처분하고, 그 돈으로 중국 특산물을 다시 사서 귀국하는 내용이다.

주요 장면이 설정돼 있으며 대화체로 꾸며져 있어 자연스레 중국어 회화를 익힐 수 있게 돼 있다. 오늘날의 실전 회화 교재처럼 당시에는 역관들의 필수 교재였다.

몽골어 학습서인 ‘몽어노걸대’는 중국어 학습서인 ‘노걸대’를 몽골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조선중기에는 일본어 교재인 ‘첩해신어’가 편찬됐다.

◆사역원에서는 외국어만 사용

독특한 것은 사역원 내에서는 외국어만 사용하도록 했다. 이를 어길 경우 현직에 있는 자는 파면시킨 후 1년 이내에 역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역학생도는 어긴 횟수에 따라 벌칙이주어졌다.

세종실록(세종 24년 2월 14일)에 따르면, 사역원 도제조, 신개 등이 임금에게 아뢰는 장면이 나온다. 내용에 따르면 ‘지금 여러 통역하는 자를 보면, 중국말을 10년이나 되도록 오래 익혔어도 사신으로 중국에 두어 달 다녀온 사람만큼도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은 다름 아니라 중국에 가게 되면 듣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다 중국 말뿐이므로 귀에 젖고 눈에 배어지는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부터 사역원 안에서는 오로지 중국말만 쓰기로 하며, 크게는 공사 의논부터 작게는 음식 먹는 것이나 기거하는 것까지도 한가지로 중국말만 쓰게 하소서. 그 밖에 몽골어, 일본어, 여진어의 학도들도 이 같은 예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시옵소서’라고 했다.

사역원에는 오늘날처럼 원어민이 어학 교육을 담당했다. 이들은 중국이나 주변국에서 구화한 사람이거나 후손으로, 향화인(向化人)이라 했다. 세종 16년에는 귀화하는 왜인과 야인들이 살 집은 관청에 속한 빈집을 주고, 빈집이 없으면 집을 지어줬다.

특히 몽골어는 미래를 위해 포기하지 않았다. 정조실록(정조 7년 7월 18일)에 따르면,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몽고와 우리나라가 지금은 비록 함께 통신(通信)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국경 지역이 매우 가까운데 그들의 병마(兵馬)가 가장 거세므로 앞날의 일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어찌 소홀히 여기어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어 몽골어를 익힐 것을 권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리니 정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처럼, 세계화 시대인 오늘날에 못지않게 조선시대에도 외국어 교육이 열풍을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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