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곳간] “백성에게 물어 보아라” 조선의 여론조사는?
[문화곳간] “백성에게 물어 보아라” 조선의 여론조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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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곳간, 조선시대 여론조사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8
문화곳간, 조선시대 여론조사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8

 

세종, 조세개혁 백성에게 물어
오랜 연구·논의 끝에 법 제정
영조, 공사 시 민력 동원 전에
여론조사 통해 동의 얻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여론조사를 벌이는 것이 익숙한 시대다. 최근 ‘6.13지방선거’와 관련된 여론조사가 실시되는 등 사안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조선시대에도 국가에서 중대한 사안을 결정할 때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기록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여론조사는 어떤 것이 있을까.

◆조세 문제 해결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에는 세율규정법인 ‘답험손실법’을 사용했다. 한 해의 농업 작황을 현지에 나가 조사해 등급을 정하는 ‘답험법’과, 조사한 작황 등급에 따라 적당한 비율로 조세를 감면해주는 ‘손실법’을 합한 것이다. 즉, 해마다 풍작 정도를 조사해 세율을 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세금은 제대로 걷히지 못했다. 관리들의 농간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세종은 매년 일정한 조세를 징수할 수 있는 ‘공법(貢法)’을 입법해 조세개혁을 하고자 했다. 공법을 시행하면서 관리와 아전이 조세 징수를 위해 답험하는 재량권이 사라지고 이에 따른 접대비와 관련 비용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1418년 즉위하자마자 공법에 대한 시행 의지가 강했다. 1427년(세종9) 문과 증시 시험에 ‘공법을 사용하면서 좋지 못한 점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출제하기도 했다.

1428년(세종10)부터는 조정 대신과 본격적으로 이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조정 대신의 반대가 있었지만 세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조정 대신과 ‘공법의 시행조건’과 방법에 대해 논의를 계속 이어갔다.

이에 따라 세종 12년(1430)에 공법에 대한 안이 나왔다. 1430년 3월 5일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호조에서 공법에 의거하여 전답(田畓)1결(結)마다 조(租) 10말(斗)을 거두게 하되 예전부터 내려오는 폐단을 덜게 하고, 백성의 생계를 넉넉하게 할 것을 아뢰고, 임금은 새로운 법 시행에 대한 찬반을 백성에게 묻도록 했다. ‘여론조사’를 벌인 것이었다.

여론조사에 참여한 수는 총 17만 2806명이었다. 이 중 공법에 찬성하는 자는 9만 8657명, 반대하는 자는 7만 4149명이었다. 찬성의 수가 더 높았지만 세종은 곧바로 법 시행을 하지 않고 더욱 연구했다. 세종은 마침내 토지 비옥도에 따라 ‘전분 6등법’, 풍흉의 정도에 따라 ‘연분 9등법’을 확정했다. 이처럼 여론의 수렴 과정을 거쳐 마련한 공법은 조선말까지 세법의 기본이 됐다.

◆영조의 청계천 준설 공사

청계천이 처음 지어진 것은 태종 때다. 하지만 태종 7년(1407) 5월 27일 큰비가 내려 한성의 개천이 모두 넘쳤고, 대규모 개천공사가 이듬해까지 진행됐다. 청계천은 한성이 신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17세기 이후 도시 빈민층이 늘어났다. 당시에 남산 일대의 수목이 땔감용으로 남벌되고, 일부가 경지로 개간돼 토사 유입량이 증가했다.

또 홍수로 인한 청계천의 범람이 문제가 됐다. 이에 영조는 청계천 준설 공사를 지시하게 됐다. 준설(浚渫)은 하천이나 해안의 바닥에 쌓인 흙이나 암석을 파헤쳐 바닥을 깊게 하는 일이다.

영조는 광통교에서 시냇가에 있는 백성들을 불러 시냇가를 파내는 것이 어떤지에 대해 물었다. 1752년(영조28) 1월 27일자 영조실록에는 “나는 민력(民力)을 거듭 지치게 할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이제 보건대, 막혀 있는 것이 이와 같고 또 성을 지키려면 시내를 파내는 것이 더더욱 급선무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기록돼 있다.

이에 백성은 “신 등이 어렸을 적에는 기마가 다리 아래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지금은 다리와 모래가 서로 맞닿게 되었습니다. 전에 일꾼을 동원하여 깨끗이 쳐내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막힌 것이 또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한다.

그러자 영조가 다시 묻기를 “나는 다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제 보건대, 다리가 막힌 것이 이와 같으니, 쳐내고 싶다. 그대들은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가”라고 하자, 백성은 “이는 모두 백성을 위하는 일이니,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한다.

이에 따라 영조 36년(1760년) 2월 준설공사를 시작해 4월에 끝났고, 20만명이 공사에 참여했다. 영조는 백성을 괴롭게 할 수 없다하여 수만 민(동전 1천닢을 꿴 한 꾸러미)을 내어 일꾼을 사서공사를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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