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우리 민족의 전통악기 거문고는 작게 연주하면 속삭이는 것 같고, 힘차게 내려치면 우렁찬 대장부의 소리를 낸다. 가야금이 여성적 음색이라면 거문고는 남성적 소리를 낸다. 대대로 선비들은 거문고를 애호했다.

거문고하면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이 생각난다. 중국 순임금은 오현을 켰고, 주나라 문왕은 칠현을 썼다. 일찍이 중국 진나라는 고구려에 칠현금을 보냈다. 왕산악은 이 칠현금을 개량해 육현금을 만들었다. 왕산악의 거문고는 현학금(玄鶴琴)이라 했는데 검은 학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기 때문에 그랬다 한다. 안악 제3호분 벽화와 통구 무용총 벽화에는 고구려인의 거문고 연주 모습이 그려져 있다.

3월 중순에 KBS 1TV ‘천상의 컬렉션’에서 국악인 오정해가 호스트 한 ‘특별한 거문고’ 방송을 보았다. 이 거문고는 밑바닥에 구멍이 크게 뚫려 있었는데 내팽개친 오동나무 문짝으로 만든 것이어서 더욱 흥미로웠다.

조선의 어느 선비가 거문고를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좋은 재질의 오동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동화문(東華門) 밖에 있는 한 노파의 집에서 좋은 나무를 찾았다. 그 오동나무는 다 낡은 문짝(門扉)이었는데 내팽겨져 있었다. 선비는 노파에게 이 나무가 오래된 것이냐고 물었다. 노파는 대략 1백년 정도 됐는데 문짝 하나는 부서져 벌써 밥 짓는데 썼다고 대답했다.

선비가 거문고를 만들어서 타 보니, 소리는 맑은데 거문고 밑바닥에 사립문을 만들었을 때의 못 구멍이 세 개나 있었다.

마치 ‘후한서’의 ‘채옹열전’에 나오는 초미금(焦尾琴)과 같았다.

초미금의 유래는 이렇다. 중국 동한 시대 오나라에 어떤 사람이 오동나무로 불을 피워서 밥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채옹이 그 불타는 소리를 듣고 그 나무를 달라고 하여 거문고를 만들었는데 과연 아름다운 소리가 났다. 채옹은 이 거문고를 ‘초미금’이라 불렀는데 오동나무 끝에 불탄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선비는 거문고 바닥의 구멍 오른편에 글을 새겼다.

만물은 외롭지 않으니            物不孤
마땅히 짝을 만나게 되는데     當遇匹
백세의 긴 세월이 멀어지면     曠百世
필히 만나기도 어렵지만         惑難必
아, 이 오동나무는                  噫, 此桐
나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不我失
서로가 기다린 게 아니라면     非相待
누구를 위해 나타났을까.         爲誰出

또한 거문고 걸이에 명문(銘文)을 달았다.

‘금(琴)이란 내 마음을 단속(禁)하는 것이니 (琴者禁吾心也)
걸어두어 소중히 여기는 건 소리 때문만은 아니로다. (架以尊非爲音也)’

소리로 마음을 단속하려는 선비가 바로 1498년 무오사화로 희생된 사관(史官)인 탁영 김일손(1464~1498)이다. 또한 특별한 거문고는 보물 제957호 탁영금(濯纓琴)이다.

김일손은 ‘탁영선생문집’의 ‘육현금의 뒷면에 쓰다’ 글에서 거문고를 만든 사연을 적어 놓았는데, 그는 1493년 겨울에 신용개, 강혼등과 독서당에서 공부하면서 여가에 거문고를 배웠다.

또한 ‘오현금의 뒷면에 쓰다’ 글에는 “육현금은 독서당에 비치하여 두고 오현금은 집에 두었다. 이는 외양으로는 지금의 것을 따르나 내면으론 옛것을 따르고자 함(外今內古)”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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