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이화장(梨花莊)을 찾았다. 이화장은 1945년 광복 직후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거주한 곳이다. 공사 중이라서 집 앞의 이승만 대통령 동상만 보았다. 동상 아래에 새겨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가 새삼스럽다.

원래 이화장은 세조 때 영의정을 한 최항(1409∼1474)이 살던 집이었다. 그런데 1490년에 성종은 이 집을 사들여 요동질정관으로 중국에서 돌아온 탁영 김일손(1464∼1498)에게 하사했다. 김일손이 모친 봉양을 위해 사직을 청하자 모친과 함께 기거토록 한 것이다.   

김일손은 바위 샘 위에 1칸 자리 정자를 짓고 ‘이화정(梨花亭)’이라 이름 지었다. 봄이면 주위가 하얀 배꽃으로 물들 정도로 배나무가 많았기에 그렇게 지은 것이다.

김일손은 ‘집 모퉁이에 핀 배꽃(屋角梨花)’ 시를 지었다. 이 시는 성종이 지은 ‘비해당((匪懈堂) 48영 차운 시’에 답한 시이다. 성종은 ‘비해당 48영 차운 시’를 홍귀달, 채수, 유호인, 김일손에게 차운 시를 올리도록 했다. 

원래 ‘비해당 48영시’는 세종대왕의 3남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자신의 별장인 비해당의 풍물 48가지를 읊은 시이다. 그는 1450년 가을에 ‘48영 시회’를 열었는데 이 모임에는 당대 문사인 최항·신숙주·성삼문·이개·김수온·서거정·강희맹 등이 참여했다.  

안타깝게도 안평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면 김일손이 1493년 8월 호당에서 사가독서 할 때 지은 시를 감상해보자.  

‘집 모퉁이에 핀 배꽃 (屋角梨花)
눈 맞은 나무 봄기운 이니 더욱 화창하고
노란 빛 쪼그린 여린 새잎에 꽃 피네 
흰 소매는 서리를 깔보니 수심 젖은 흰나비
곱게 치장한 미혹한 달 젊은 미인 질투하네. 

가벼이 바람 불어 꽃향기 가득 이르고 
쓸쓸히 비 내려 눈물 자욱 비껴 있네. 
비록 맑고 깨끗함이 색칠하지 못했어도 
화려함 뽐내는 붉은 복사꽃 보다 낫네.’    

이왕이면 성종의 시도 함께 감상하자.  

‘다정이 봄날이 알맞게 맑고 화창하니 
집 모퉁이의 배나무가 백설 같은 꽃을 피웠네. 
안 뜰에 맑고 밝은 달을 감춰둔 듯 
정자 난간에서 곱디고운 달빛에 취하네. 

짙은 향기는 순로(전설속의 향초)의 향기가 뼈 속에 스미는 듯 
맑은 그림자가 바람에 쏠리니 월말(越襪)이 비낀 듯하다. 
옥 같은 천연의  꽃모습은 조물주의 교묘한 솜씨인데 
두견새의 맑은 소리 봄의 좋은 시절 기억하리라.’ (김일손, 탁영선생문집, 2012, p.437~438)

그런데 김일손은 1495년(연산군 1년)에 충청도사로 근무하면서 병폐 26개조의 소를 올렸는데 이 소에는 단종의 모후 현덕왕후의 묘인 소릉복위도 포함돼 있었다. 이후 김일손은 사직하고 하사받은 집을 반납한 뒤 청도로 낙향했다.   

사관 김일손은 1498년 7월 무오사화로 능지처사 당했다. ‘성종실록’ 편찬과정에서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유자광이 세조의 왕위 찬탈로 몰았고, 사림들이 화를 입었다. 

김일손이 죽은 후 이화정이 누구의 소유였는지 알 수가 없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이화정 10경시(十景詩)를 남겼고, 1908년 황성신문에 이화정에서 활쏘기 행사를 했다는 기사가 있을 따름이다. 안타깝게도 일제 때 이화정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