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東風吹かば 匂ひをこせよ 梅の花
主なしとて 春な忘れそ

동풍이 불거든 향기를 보내다오, 매화꽃이여.
주인이 없다 해도 봄을 잊지 말지니.

3월 초에 일본 규슈 후쿠오카 교외에 있는 다자이후 텐만궁(太宰府 天満宮)을 찾았다. 본전 앞 우측에 있는 비매(飛梅, 도비우메)를 탐미했다. ‘飛梅’라고 적힌 표시판이 있고, 안내문에는 ‘천신(天神)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真)가 교토의 집 정원 앞에 있는 매화와 작별하면서 와카(花歌)를 읊었다. 그런데 주인을 못 잊어하던 그 매화가 교토에서 다자이후로 날아와 하룻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다’고 적혀 있다.

스가와라 미치자네는 ‘학문의 신’이 된 실존인물이다. 845년에 태어난 그는 신동이라 불렸다. 할아버지 기요토모와 아버지 고레요시는 뛰어난 유학자였다. 일설에 의하면 스가와라 가문은 백제 왕인 박사의 후손이라고 한다.

미치자네는 열한 살 무렵 집 뜰에 핀 매화를 보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총명했다.

달이 하얗게 비추니 마치 눈 내린 듯하고(月燿如晴雪)
매화꽃은 빛나는 별 같구나.(梅花似照星)
금빛 거울(달)이 하늘에서 비추고(可憐金鏡轉)
정원에 핀 옥구슬(매화)이 온 뜰을 향기로 채우는구나.(庭上玉房馨)

스가와라는 18세 때 과거에 합격한 후 승승장구 했다. 891년에 다이고 천황은 그를 우대신(右大臣)으로 임명했다. 스가와라의 딸이 천황의 황후가 되어 세력을 확대하자, 좌대신 후지와라 토키히라는 음모를 꾸며 901년에 스가와라를 규슈 다자이후 권수(権帥)로 좌천시켰다. ‘쇼타이의 변’이었다.

사실상 유배 간 스가와라는 실의의 세월을 보냈다. 끼니도 거르자 한 노파가 ‘매화가지에 꽂은 찹쌀떡(우메가에모찌, 梅ケ枝餠)’을 건넸다. 스가와라는 이 떡을 맛있게 먹으면서 노파에게 시 한 수씩을 건넸다.

스가와라는 다자이후로 좌천된 2년 만인 903년에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그의 관 위에는 매화가지 하나와 찹쌀떡만이 얹어졌다. 유해를 소달구지에 싣고 장지로 향하던 중 황소가 갑자기 멈췄다. 이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스가와라의 시신은 소가 멈춘 이곳에 묻혔다.

한편 스가와라가 죽은 후 교토 조정은 액운이 잇따랐다. 정적(政敵) 후지와라가 909년에 급서(急逝)하고, 다이고 천황의 세자인 야스아키라 친왕이 923년에 서거했고, 손자 요시요리도 925년에 죽었다. 930년에 황궁 청량전(清涼殿)에서 조정 회의 중에 갑자기 벼락이 떨어졌다. 이리하여 조정 대신들이 다치거나 죽었고, 다이고 천황도 충격을 받아 3개월 만에 붕어했다.

조정은 이것을 스가와라의 저주로 여겨 스가와라의 원령을 ‘뇌신(雷神)’으로 추앙했다. 그리하여 교토와 다자이후에 덴만구(天満宮)를 지었다. 세월이 흘러 재해가 사그라들자 스가와라는 ‘벼락 신’에서 ‘학문의 신’으로 변신했다.

한편 본전 앞에는 도비우메와 마주보고 홍매화(紅梅花)가 피어있다. ‘황후의 매화’이다. 이 두 그루 매화가 신목(神木)이 되어 이곳에 6천 그루의 매화가 있단다.

텐만궁은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 연간 800만명의 참배객이 모인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우메가에모찌’를 먹는다. 이 떡을 먹으면 병마를 물리치고 정신이 맑아져서 공부가 잘 된단다.

관광지가 붐비는 것은 볼거리·먹거리가 중요하고 스토리 역시 한몫을 한다. 한국도 관광지에 스토리를 입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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