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선생 동상과 면암최익현선생숭모사업회 양호식 회장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7
최익현 선생 동상과 면암최익현선생숭모사업회 양호식 회장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7

인터뷰|양호식 면암최익현선생숭모사업회 회장

의병활동하다 대마도에 유배돼
목숨 걸고 단식하다 ‘아사순국’
‘유해 고향 묻어 달라’ 유언 남겨
 

“논산 가매장 후 예산에 안치됐지만
유림·유족 동의 없이 만들어진 것”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외세로 인해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한 조선 말기.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지주이자 실천가였던 면암 최익현 선생은 오직 나라의 존망과 백성의 안위만을 걱정했고 민족의 혼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다.

그는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꿇어앉아 일본과의 조약에 결사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단행되자 ‘내 목을 칠지언정 내 몸의 터럭 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며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을 때에도 상소를 올려 강하게 맞섰다.

74세의 고령의 나이에는 임병찬·임락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일제에 체포된 후 대마도에 유배됐고 일제가 주는 물 한 모금, 밥 한 톨을 거부하며 목숨 걸고 단식으로 항거했다.

현재 최익현 선생의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에 안치돼 있다. 이에 대해 면암최익현선생숭모사업회 양호식(60) 회장은 “현재 묘는 면암 선생이 고향으로 유해를 보내달라는 유언을 무시하고, 유족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일제의 강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고향인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의 생가 터 인근으로 유해를 이장하는 것이 면암 선생의 유언을 받들고 일제의 불의를 불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양 회장과의 1:1 인터뷰.

-일제에 의해 충청남도 예산에 묘소가 안치된 배경은.

대마도에서 순국하고 부산으로 시신이 운구됐다. 부산에 시신이 도착하자마자 각계각층의 국민이 애도하며 몰려들었다.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자 일제는 두려움을 느꼈고, 운구가 계속 북쪽으로 올라오다 논산에 이르러 가매장됐다. 그리고 약 2년 후 예산으로 옮겨 인적이 드물고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묘소를 만들었다. 이곳이 현재의 묘소다. 하지만 이 묘소는 고향으로 유해를 보내달라는 면암 선생의 유언을 무시하고 일제의 강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일제는 유족이나 유림의 동의를 얻지 않고 시신을 안장했다.

- 해방 이후에 이전하지 못한 이유는.

해방은 됐지만 시대 상황으로 이전이 쉽지 않았다. 그 이후 면암 선생의 유언을 받들고 일제의 불의를 씻어버리려는 문제 제기가 없었다. 이제 더 이상 방관하는 것은 국민정신을 바로 세우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오늘날 유해 이장을 추진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다. 첫째는 면암 선생의 유언이다. 면암 선생은 대마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단식으로 항거하며 조선의 국혼을 지켰다. 그때 제자 임병찬에게 ‘내가 죽으면 내 유해를 고향에 가져다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유해 이장은 면암 선생의 유언을 받드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일제의 불의를 척결하는 것이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 이뤄진 것을 그대로 존치하는 것은 일제의 불의를 묵인하는 것이다. 유해 이장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으로서 현 정부의 방침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 유해 이장을 위한 현재 진행 상황은.

5월까지 유족의 전원 동의를 얻은 후 행정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행정적인 노력은 문화재 지정을 어떻게 푸느냐이다. 문화재지정을 해제하는 것은 해당 관청에서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묘소 자체는 그대로 두면서 문화재로 유지하되 유해만 모셔오는 방법도 생각하고 있다. 민법상 유해를 모시는 것은 유족의 의사가 우선하도록 돼 있다. 이와 관련해서 충청남도, 예산군, 문화체육관광부와 협의하려고 한다. 면암 선생의 유언을 받드는 일에는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예산의 최익현 선생 묘 (출처: 예산군청)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7
예산의 최익현 선생 묘 (출처: 예산군청)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7

- 면암 선생의 ‘아사순국’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이 구한말 면암 선생이 활동한 시대와 거의 유사하다. 과거에는 외세 열강의 압박 속에서 침략의 위기가 있었고, 오늘날은 열강의 갈등 속에서 남북이 대립하고 있다. 면암 선생의 정신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살리는 ‘애국애민정신’이다.

면암 선생의 정신을 ‘충의 정신’이라고도 표현한다. 충의(忠義) 정신에는 단계가 있으나 면암 선생은 최상의 단계인 목숨을 내놓는 단계를 보여주셨다. ‘충’ 의 핵심은 자기가 갖고 있는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도 다 내놓고 자기 직분을 완성하는 것이다. ‘의’ 는 사람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것이고, 염치를 아는 것으로서 최상의 단계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이다. 최상의 의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고 나서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충의 정신은 훗날 독립운동의 정신적 근간이 됐다. 1945년 해방되고 환국한 백범 김구 선생은 첫 행사로 상해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충남 청양의 모덕사를 찾아 면암 선생께 ‘고유제문(告由祭文)’을 드렸다. 이 사실을 보면 면암 정신이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임시정부의 정신적 근간에는 면암 선생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면암 선생의 정신은 우리나라 국민정신의 근간이 돼야 한다. 면암 선생의 정신을 통해 우리의 국가적인 위기를 타개할 수 있고, 우리가 세계 으뜸 국민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같은 정신적 토양을 가지고 있음에도 활용을 못 하는 게 현실이다. 면암 선생의 정신이 우리나라의 임시 정부의 근간이 되고, 건국이후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가고 있으므로 면암 선생의 정신이 국민정신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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