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면암 최익현 선생 영정 (제공:면암숭모사업회 제공)

경기도 포천서 출생, 어릴 때부터 골격이 비범
애국지사이자 의병장… 위정척사운동 선봉장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물밀 듯이 외세가 밀려들어 오던 조선 말기. 올곧은 선비의 길이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 인물이 있었다. 조선말기 애국지사이자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 선생이다.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힘쓴 최익현 선생의 정신을 들여다보자.

◆태어날 때부터 비범한 아이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한 나라의 기운이 서서히 기울던 때였다. 조선왕조 말인 1833년 최익현 선생은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이요. 경기도 포천 신북면 가채리의 자택에서 동중추 지헌(同中樞 芝軒) 최대와 경주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골격이 비범하고 눈빛이 별빛 같았다고 한다. 관상가는 아이를 보고 범의 머리에 제비 꼬리와 같은 턱의 모습을 한 호두연함(虎頭燕頷)형이니 한없이 귀하게 될 상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릴 때의 그의 이름은 기남(奇男)이었다.

14세 되던 해 봄, 최익현은 스승인 전 공조참판 이항로를 만나게 된다. 이항로는 최익현에게 ‘면암’이란 호를 직접 써서 선사했다. ‘힘쓰는 사람’이란 뜻이 담겨있었다.

최익현은 스승 이항로가 주장한 주리적 척사위정사상을 계승해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주장하며 ‘주리척사(主理斥邪)’의 사상을 행동으로 실천해 위정척사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이러한 척사위정 사상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위기상황 속에서 민족의 자존을 위한 항일의병투쟁과 독립운동 등 민족주의 사상으로 발전했다.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의 최익현을 봉사하는 사당인 ‘채산사’ (제공:면암숭모사업회 제공)

◆도끼 들고 상소문 올리다

최익현은 1868년, 36세 때 사헌부장령으로 임명됐다. 사헌부는 오늘날의 감사원 같은 곳으로, 잘못된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벼슬아치의 잘못을 탄핵하던 관청이다. 최익현은 상소문 시폐(時弊) 4조를 올리는데, 대원군의 정책에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으로 토목공사를 중지하고 취렴정치(백성의 제물을 탐내어 함부로 거둬들이는 것)를 금하며, 당백전(경복궁 공사하면서 새롭게 발행한 돈, 오늘날의 국채 같은 것)을 혁파하고, 4대문의 통행세를 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대원군의 실정으로 언로가 막히고 민정이 절박했던 상황이었다. 그 누구도 말 한마디 못하던 상황에서 최익현은 목숨을 건 상소문을 썼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후 최익현은 41세에 대원군의 권력남용을 통렬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때 고종은 친정을 선언하고 대원군은 권력을 내려놓고 하야하게 된다. 하지만 최익현이 부자간을 이간시켜서 천륜을 끊었다는 반대파(남인세력)에 혹독한 비난을 받게 된다.

또 일본과 통상조약을 추진하던 민씨척족의 옹폐(壅蔽)를 비난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소를 올리는데 그 내용이 과격하고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주도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한다. 이후 고향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다시 상소를 올릴 사건이 발생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것.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꿇어앉아 일본과의 조약을 결사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옆에 도끼를 둔 것은 상소를 가납하지 않는다면 목을 쳐달라는 강력한 충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4년간의 머나먼 흑산도 위리안치라는 유배 길이었다.

왜인(倭人)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단행되자 최익현은 ‘내 목을 칠지언정 내 몸의 터럭 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며, 상소를 올려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을 때도 상소를 올려 강하게 맞섰다.

▲ 최익현 선생 묘 (제공: 면암숭모사업회 제공)

◆의병 일으켜 나라 구할 것 결의

하지만 이 일로 상소투쟁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게 됐고, 무력에 의한 항일의병운동으로 실천하게 된다. 최익현은 1906년 6월 전라도 태인 무성서원에서 임병찬 등과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할 것을 결의한다. 이렇게 창의한 의병은 태인읍을 무혈점령하는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주민과 관리들의 환영을 받으며 순창에 입성할 때는 그 수가 500여명에 달했다.

하지만 1906년 6월 8일에는 남원 진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순창으로 퇴각한지 얼마 안 돼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鎭衛隊)와 싸우게 된다. 이후 살아남은 의병이 모두 해산했고 21명은 끝까지 최익현의 곁에 남았다.

최익현은 이들과 함께 순창 객사로 몸을 피해 임병찬에게 명령하기를 “고인은 포위된 성(城)안에 있으면서도 관을 쓰고 예를 행하여 조상을 뵈려고 하였으니, 지금 제군은 의관을 정제하라”고 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행낭을 풀어서 도포를 꺼내 입고, 갓끈을 다시 메고 공수(拱手)하고 벽을 등지고 꿇어앉았다. 곧이어 추격해 온 양대 지방 진위대의 빗발치는 탄환에 9명이 죽고 살아남은 12명은 체포 구금돼 서울로 압송됐다.

최익현은 적지인 대마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단식으로 항거해 조선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하지만 노쇠하고 지친 몸에 병이 들어 회복되지 못하고 1906년 11월 17일 74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오직 나라의 안위만을 걱정했던 최익현 선생의 올곧은 충의정신은 역사 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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